지구에서의 예수의 사명


예수는 깨달음과 이해(knowledge)를 인류에게 전해주기 위해 미래로부터 지구에 왔던 에너지였습니다. 예수는 다른 세계,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차원에서 왔으며, 높은(고양된) 에너지를 이 세상에 가지고 왔었습니다. 지구에 육화해 있는 동안에도, 예수는 더 큰 자아(Greater Self)를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나, 예수아의 내면에 예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물질의 법칙에는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으며, 이적(異蹟)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예수아라는 인간이 지구에 온 이유는 다른 의식 상태와 통하는 문호, 혹은 통로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모든 인간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고자 했었습니다.

예수가 왔던 빛의 세계에서는 지구의 실험(earth experiment)에 연루된 영혼들이 거대한 어둠과 자기-소외감(self-alienation) 속으로 빠져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변화를 위한 강력한 자극이 주어져, 인간들이 활용할 수 있는 선택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에너지체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인간(인간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어, 자신들의 신성한 근원과 내면에 지니고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 즉 평화와 자유 그리고 자기 자신을 통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기시켜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주인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버리고, 빛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변형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알고 있으며,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주장하는 외부의 인물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내어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 의학, 교육, 기타 등등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연예 산업은 행복, 성공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거짓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거짓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쓰이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대중매체, 신문, 영화, 라디오 그리고 TV를 통해,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러한 이미지들이 왜 존재하는 걸까요? 그러한 이미지들을 누가 만드는 걸까요?


이미지들은 힘을 사람들에게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지들은 육체적인 힘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순종적이고, 자신들의 참된 욕구와 단절되도록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힘과 자존감을 자발적으로 버리게 되며, 굳이 어떤 것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이미지가 나타내는 가치들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마인드-컨트롤이라 부르며, 이것은  서구의“자유”사회들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빛이 지니고 있는 기능은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사고와 느낌의 틀에 명료성과 자각, 그리고 투명성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빛은 마인드-컨트롤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빛이 현실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빛은 권력과 권위의 속박을 깨고, 그러한 권위에 기초한 위계질서를 허물어뜨리게 됩니다. 권력이 악용되는 것을 빛에 노출시킴으로써, 빛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가는 망상과 환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에 살았던 지배계급에게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했던 말, 그리고 예수가 방사했던 빛으로 인해, 당시의 권력층들은 참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참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짊어졌던 빛의 일꾼이라는 역할의 무게는 무거웠습니다. 이토록 강렬하고, 밝은 에너지를 내 생에 내내 지니고 다니겠다고 동의했던 나, 인간 예수아에게는 특히 무거웠습니다. 나, 예수아는 예수의 현존, 즉 미래의 나 자신인 현존이 지니고 있는 힘에 거의 압도당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힘으로 인해, 나는 엄청난 통찰력과 사랑, 그리고 영감을 지닐 수 있게 되었지만, 육체적으로 예수의 에너지를 지니고 다니거나, 유지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예수의 에너지를 내 육체로 흡수할 수가 없었으며, - 내 몸의 세포들은 예수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 물질 차원에서 보면, 내 몸은 이토록 강렬한 빛의 에너지를 지니고 다니느라 기진맥진해져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면을 제외하고, 정신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나는 가까운 친구들이나,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에너지가 지니고 있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며, 괴로워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종종 절망했으며, 내가 동의했던 여정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에너지의 본질을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진실로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예수가 지구에 왔던 결과들


예수가 지구에 옴으로써, 지구에는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이 씨앗은 그리스도의 에너지라는 씨앗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에 의해 감동을 받았으며, 영혼의 차원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기억은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뭔가가 건드려졌으며,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즉 물질세계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차원에서 보면, 내가 오게 됨으로써, 많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원성의 법칙으로 인해, 강력한 빛의 주입은 어둠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의 문제입니다. 빛은 어둠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은 힘이 지니고 있는 구조를 허물어뜨려, 갇혀 있는 에너지를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반면에, 어둠은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이 두 에너지들의 이해관계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가 힘을 가지면, 상대편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반격을 가함으로써, 다시 균형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 지구에 오게 됨으로써, 내가 지구에 펼치고자 했던 빛에 대한 반작용으로, 많은 투쟁과 폭력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나를 따랐던 추종자들, 즉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이러한 폭력적인 역반응(counter reaction)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그 자체, 즉 교회를 설립했던 사람들 역시도 내 가르침들을 전파하는데, 폭력의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에 대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대다수의 악행들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비-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지구에 빛의 사절(使節)로 보내기로 결정했던 빛의 스승들은 전례가 없었던 예수의 강렬한 에너지가 어둠으로부터 강렬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혜성처럼, 지구의 현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빛의 세계로부터, 즉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에너지로부터 내려온 일종의 비상조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가 향하고 있던 방향을 전환시키려고 했던 마지막의 시도였으며,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무지와 파괴의 순환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의 빛으로 인해 많은 어둠이 - 역반응의 형태로 - 생겨나게 되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의식이라는 씨앗이 심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왔던 중요한 목적은 지구에 살고 있는 빛의 일꾼이라는 영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빛의 일꾼이라는 개념에 대한 다른 채널링 자료 참조) 빛의 일꾼들은 지구라는 행성의 높은 밀도와 어둠 속에서 비록 길을 잃기는 했지만, 내가 지니고 있던 에너지에 아주 민감했으며, 아주 잘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빛의 일꾼들 역시도 예수와 똑같은 사명을 지닌 빛의 사절(使節)들입니다. 차이는 물질적인 몸속으로 육화할 때, 나보다 더 큰 신성한 자아(Self)와 덜 연결되었을 뿐입니다. 빛의 일꾼들은 지구의 카르마적인 부담과 환상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과거로부터의 속박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육화할 때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는 과거의 카르마적인 부담을 전혀 지니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신성과 보다 쉽게 접촉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여기에 존재했었지만, 미래로부터 온 현존은 여기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에너지를 지구라는 실체 속으로 주입하기로 결정했던 빛의 존재들이 지녔던 의식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며, 전지(全知) 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이해해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어떠한 신성한 계획에 의해, 모든 것들은 미리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고 집요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뒤에는,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다는 개념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외적인 힘에 의해, 운명은 사전에 예정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는 내적인 선택의 결과인 개연성(probabilities)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집단적인 빛의 에너지가 내린 의사결정에 따라, 내가 지구에 왔던 것이며, 예수는 이러한 집단 에너지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에는 위험과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수반되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집단적인 빛의 에너지는 천사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천사의 세계는 사람과 지구를 창조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인류 및 지구와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도 천사계의 일부이며, 이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지금 다차원적으로, 즉 여러분이 생각하는 직선적인 시간의 틀에서 벗어난, 의식의 단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원, 혹은 시간의 틀에서 보면, 여러분도 이러한 천사들이며, 예수가 지구로 내려왔던 빛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들입니다. (빛의 일꾼 시리즈 마지막 장 “ 빛의 자아”에서 다차원 및 여러분의 천사적인 본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함) 여러분, 즉 빛의 일꾼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의 사건, 즉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지구에 주입했던 사건과 훨씬 더 깊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예수의 사건은 집단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며, 여러분도 모두 이 사건에 참여했으며, 나, 즉 예수아는 보이는 육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었을 뿐입니다.


내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모든 인간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에너지가 씨앗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권위를 가진 어떤 인물로 우러러본다면, 그것은 내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바깥에 존재하는 권위를 가진 어떤 인물을 믿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자신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믿기를 바랐으며, 지금도 바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식적인 기독교는 여러분이 접촉할 수 없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음으로써, 나를 숭배하고, 복종해야 하는 인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내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내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나의 인간성을 다시 내게 돌려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살과 피를 가졌던 예수아(Jeshua)이며, 진실로 나는 여러분 모두의 친구이자,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