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쉬의 비파싸나 명상법 관련 강의들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서 올려 드립니다.
원래의 가르침들을 가급적 순서대로 옮기려 했으나 분량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일부 가르침은 중간중간 여기에 싣지 않은점 양해 바랍니다.

이 강의의 원본은 도서출판 황금꽃( www.goldenflower.co.kr )에서 나온 <오쇼 비파싸나 명상법> Tape 에 수록된 내용들 입니다.현재 절판된 걸로 알고 있읍니다만 비파싸나에 대한 오쇼의 가르침들이 대단히 명료하고 알기 쉽게 되어있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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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싸나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바라보다' 이다.그리고 그 은유적인 의미는 '지켜보다' '주시하다' 이다.


고타마 붓다는 명상의 정수라고 할수 있는 명상을 선택했다. 모든 다른 명상들은 주시의 여러 형태이다. 그러나 주시는 모든 명상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나타난다.주시를 제외할수는 없다.붓다는 다른 모든것을 제외하고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주시하는 것만을 남겨 놓았다.


주시에는 세단계가 있다.붓다는 매우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그는 육체로 부터 시작한다.왜냐하면 육체가 가장 주시하기 쉽기 때문이다.손이 움직이는 것을, 손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주시하는 것은 쉽다.


나는 나 자신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주시할수 있다.나는 걸으면서 각각의 걸음을 주시할수 있다.나는 내가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주시할수 있다.


그래서 비파싸나에서 첫번째 단계는 육체의 행위를 주시하는 것. 가장 단순한 단계이다.어떤 과학적인 방법도 항상 쉬운것부터 시작한다.


육체를 주시하는 동안 그대는 새로운 경험에 놀라게 될것이다.주시하면서 주의깊게 깨어서 의식적으로 그대의 손을 움직일때 그 손에서 어떤 우아함과 침묵을 느낄것이다.


그대는 주시하지 않으며 동작을 할수도 있다.그 움직임은 더 빨라질 것이다.그러나 우아함을 잃게 될것이다.



붓다는 너무나 천천히 걷고는 했다.그래서 왜그렇게 천천히 걷는지 질문을 받고는 했다.그는 말했다. "이것은 내 명상의 한 부분이다.마치 겨울에 차가운 물속을 걷고 있는것 처럼 걷는것.그 물살은 매우 차갑기 때문에 천천히 주의깊게 걸어야 한다.또 그 물살이 매우 세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그리고 물속의 돌에 미끌어 질수 있으므로 모든 걸음을 주시해야 한다."




두번째 단계에서도 대상만 바뀔뿐 방법은 같다.


두번째 단계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이제 그대는 좀더 미묘한 세계로 들어간다.사념을 지켜보는 것이다.만약 육체를 지켜보는 것이 성공적이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사념들은 미묘한 파동이다.전자파나 전파와 같은것이다.그러나 육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일 뿐이다.사념은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그러나 공기도 돌이나 마찬가지로 물질이다.그대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물질이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이것이 두번째 중간 단계이다.그대는 보이지 않는것을 향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대의 사념들을 지켜보는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유일한 조건은 판단하지 않는것이다.판단하지 말라.왜냐하면 판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대는 지켜보는 것을 잊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을 적대시 하는 것은 아니다.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그대가 이것은 좋은 생각이다 라고 판단하는 순간 그 만큼의 주시를 놓치기 때문이다.그대는 생각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말려들었다.그대는 길옆에 서서 단지 지나가는 차들을 보는것 처럼 초연해야 한다.


칭찬하지도 평가하지도 비난하지도 말라.생각에 참여하지 말라.그대의 마음에 지나가고 있는것에 대해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말라.그대는 마치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듯이 그대의 사념들을 바라 봐야 한다.그대는 그것들에 대해 이 검은 구름은 악한자이고 이 흰구름은 성자처럼 보인다 라고 판단하지 않는다.구름은 구름일뿐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사념들 역시 그렇다.그것은 단지 마음을 통하여 지나가는 작은 파장일 뿐이다.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보라.그러면 그대는 다시 놀라게 될것이다.지켜봄이 그대안에 자리잡으면서 사념들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바로 그 비율만큼 줄어들 것이다.만약 그대의 지켜봄이 50%정도 자리잡았다면 사념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다.만약 그대가 60%만큼 지켜볼수 있다면 사념의 40%만이 거기에 남게 될 것이다.그대가 99% 순수한 주시자 일때 단지 가끔씩 1%의 외로운 사념만이 길 위를 지나갈 것이다.그것을 제외하면 통행량은 사라질것이다.러시 아워의 교통체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100% 판단없이 주시자로 남을때 그것은 그대가 단지 거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왜냐하면 거울은 결코 어떤 판단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추한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거울은 판단하지 않는다.아름다운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아무 차이가 없다.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을 때에도 거울은 누구를 비출때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순수하다.무엇을 비추든 안 비추든 거울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시는 거울이 된다.이것은 명상의 커다란 성과이다.그대는 이제 중간쯤 왔다.그리고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이제 그대는 그 비밀을 안다.그리고 그 비밀을 다른 대상에 적용시켜야 한다.이제 그대는 사념에서 더 미묘한 부분으로 향해야 한다.감정,느낌,기분..   마음에서 가슴으로..


똑같은 조건하에서 즉 판단없이 단지 주시하는 것.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것이다.그대를 사로잡고 있는 그대의 대부분의 감정,느낌,기분.그대가 슬픔을 느낄때 그대는 정말 슬퍼졌었다.그대는 슬픔에 사로잡혔다.그대가 분노를 느낄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그대는 분노로 가득찬다.그대의 전 존재가 분노로 떨린다.가슴을 지켜봄으로써 이제 그대는 그 무엇도 그대를 사로잡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다.슬픔은 오고 가지만 그대는 슬퍼지지 않는다.행복은 오고 가지만 그대는 행복해 지지도 않는다.그대의 가슴에 깊은 층 속에서 무엇이 움직이든 그대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처음으로 그대는 감정의 주인이 된다.그대는 더 이상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어떠한 감정도 느낌도 어느 누구도 그대를 방해하지 못한다.그대가 세번째 단계의 주시자가 될때 처음으로 그대는 주인(MASTER)이 된다.그 무엇도 그대를 방해하지 못한다.아무것도 그대를 압도할수 없다.모든것이 저 멀리 저 아래에 있다.그리고 그대는 언덕 위에 있다.이것이 비파싸나의 세단계이다.비파싸나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이것은 단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교가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기 때문에 극동지역의 비파싸나는 다른 구조를 갖는다.일본에서는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때 배를 주시한다.그것이 일본의 불상들이 큰 배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어떠한 인도의 불상도 큰 배를 가지고 있지 않다.큰 배는 강하고 아름다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본의 불상은 배가 나와야 한다.왜냐하면 비파싸나의 방법이 가슴이 아닌 배가 불러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가슴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남아있다.오직 배만이 숨을 쉼에 따라 들어가고 나온다.그 배를 지켜보는 것이 일본에 널리 퍼져있는 한단계로 이루어진 비파싸나이다.


스리랑카에서 첫번째 단계는 똑같이 호흡을 지켜보지만 배가 아닌 코끝을 보는 것이다.숨을 들이쉴때 공기가 코 끝에 닿는다.거기에 깨어 있어라.그리고 더운 공기가 나갈때 깨어있어라.이것이 첫번째 단계이다.그리고 두번째 단계는 숨을 들이쉴때 호흡이 돌아 나오기 직전에 '틈'이 있다.아주 잠시의 공백이 있다.호흡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 그 순간을 지켜보라.만약 그대가 이 순간들을 지켜볼수 있게 된다면 그대는 밖에서도 그 순간들을 지켜볼수 있을 것이다.숨을 내쉬고 다시 들어오기 전에 거기에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짧은 간격이 있다.그것 역시 지켜보라.단지 거기에 깨어있어라.스리랑카는 이처럼 두단계가 있다.티벳에서는 또다른 방법이 있고 한국에는 또 다른 방법 중국에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그러나 핵심은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느낌으로는 내가 설명한 세단계가 가장 쉽고 가장 간단하다.그것은 누구든지 할수 있다.이것은 학문이나 권위나 대단한 지식이 없이도 가능하다.




이 세단계 뒤에 진짜 경험이 찾아온다.이 세단계가 그대를 열려있는 사원의 문 앞으로 데려간다.그대가 육체,생각,가슴에 완전히 깨어있게 됐을때 이제 더이상 그대가 할수 있는 것은 없다.이제 그대는 기다려야 한다.이 세단계가 완전해 졌을때 네번째 단계는 그 보상으로 저절로 일어난다.그것은 가슴에서 그대 존재의 중심으로 가는 순간적인 도약이다.그대가 그것을 할수는 없다.그것은 저절로 일어난다.그것을 잊지 말라.그것을 하려고 애쓰지 말라.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그대가 실패할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스스로 일어난다.


그대는 세단계를 준비한다.네번째 단계는 존재가 그대에게 주는 보답이다.그것은 갑작스런 도약이다.갑자기 그대의 생명의 힘,그대의 주시가 존재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다.그대는 집에 온 것이다.그대는 그것을 '자아실현' 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깨달음' 이라고 부를수도 있고,또는 '궁극적인 해탈' 이라고 부를수도 있다.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없다.그대는 바로 구도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그대는 존재의 참 진리와 그 주위에 그림자 처럼 따르는 커다란 환희를 발견한 것이다.




<유태인과 아일랜드 사람이 성(性)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성직자에 따르면 성은 노동이며 오직 생식을 위한것"이라고 아일랜드 사람이 말했다.그러자 유태인이 말했다."아니오.나의 랍비는 성은 즐거움 이라고 말했소.만약 그것이 노동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시켰을 것이오.">



명상은 노동이 아니다.명상은 가장 순수한 희열이다.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욱 더 아름다운 공간들을,더욱 더 빛나는 장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대의 보물이다.깊은 더 깊은 침묵들..


이 침묵은 소음의 부재일 뿐만 아니라 음악처럼 살아 춤추는 소리없는 노래의 현존이다.


그대가 그대 존재의 궁극적인 태풍의 중심에 이르면 그대는 신을 발견한 것이다.인격체로서가 아닌 빛으로서,의식으로서,진리로서,아름다움으로서,인간이 수백년 동안 꿈꾸어 왔던 그 모든것으로서의 신을 발견한 것이다.그리고 그 꿈꾸던 보물들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


명상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행이 아니다.명상은 매우 즐겁고 음악적이며 시적인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점점더 순수한 기쁨으로 변해간다.


명상은 노동이 아니다.그것은 기도이다.내가 아는 한의 유일한 기도이다.나에게 기도의 의미는 그대가 그대의 존재를 성취했을때 존재계에 대하여 느끼는 크나큰 감사함이다.그 감사함만이 유일한 진정한 기도이다.모든 다른 기도는 가짜이며 모조이며 꾸며진 것이다.이런 감사가 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날 것이다.마치 장미꽃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