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1994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일본의 깨달은 붓다인 무묘앙 에오의 저서중의 하나인 <반역의 우주/무묘앙 에오 저/도서출판 모색>에 있는 내용들 중 일부를 옮긴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를 깨달은 붓다로 생각하며 그가 우주의 진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분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여기서 나오는 <해탈해서 사라진다> 또는 <무(無)의 영역>은 어떤 의식도 없이 영원히 죽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우주를 초월해서 무한한 순수 의식으로 존재(존재 또는 비존재라는 언어로는 표현 할수 없는 상태) 한다는 뜻이라 합니다.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無)의 영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하며 영원한 우리의 근본인 불성(佛性),본성(本性),도(道),... 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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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깨달음을 좋은 상태라고 인식하진 않는다.또 모든 생명이 마지막엔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과거 그 어떤 조사들과도 전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역사상의 조사들은 누구나 깨달음의 상태를 절대 행복으로서 칭송하고,그것을 위한 무언가를 세상에 행해왔다.


그러나 내 관찰에 따르면,그것은 결코 특정한 누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또 단순히 노력을 많이 한다고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인류의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게다가 깨달음의 결과가 타인이나 사회에 무언가 평화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것은 본인 단 한사람의 안락한 죽음을 보장할 뿐이다.


깨달음은 그것이 진짜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또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나 명상가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사건이다.그것은 일반인들이 "이리 오세요"라고 손짓할 수 있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 점을 통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같은 특수한 심리적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마취와도 같은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로 인해 인간이 치러야 할 댓가는 너무나도 값비싸다.


그것은 <혼을 버리는>일일 수도 있으며, 감정을 가진 생물에게는 참기 어려운 것이다.


깨달음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수행승도 아니요,종교인도 아니요,사랑과 행복을 찾는 인간도 아니요,명상가도 아니요,자기 포기라는 자기 만족을 위해,사람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자도 아니요,예술가도 아니요,테라피스트도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오직 두 종류의 인간들로서, 하나는 <진실을 지나치게 추구한 광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타협하지 않는 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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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와 해탈의 근본적 차이>


1(물라다라)→ 2(스바디스타나)→ 3(마니퓨라)→ 4(아나하타)→ 5(비슈다)→ 6(아지나)→ 7(사하스라라)→ 8(완전 해탈의 길과 대오,광명의 길)↔ 9↔ 10(선禪의 십우도의 끝)↔ 11↔ 12↔ 13↔ 14↔ 15


*지구의 선(禪)에서는 10번째 경지까지 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 의식 통로의 정거장은 15번째까지다.8번에 이르기 전에는 나아가는 길은 한쪽 방향이지만 8번 이후는 길을 자유로이 역행할 수도 있고 진행할수도 있다.10번째 단계가 선에서 말하는 십우도의 끝이다.13 14 15 단계의 길은 보통 사람들과 구분이 안 갈만큼 완벽하게 하강하고 있지만 의식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물질을 조절할수 있는 인종이며 아틀란티스 후기에는 지구에도 있었으나 이 차원의 존재는, 현재 지구에는 60명 정도로 추측된다.바깥 우주에는 무수하게 존재한다.



위의 도표를 보기 바란다.지구에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제8도 지점에는 <대오와 해탈의 양다리 길>이 있다.


길 전체 시스템은 15개의 정거장으로 분류된다.일반 선(禪)의 십우도에서는 8이 무(無)고, 9와 10에서 존재로 귀환한다.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순번>과 <수치>가 뒤로 갈수록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로부터의 출구는 제8지점에만 있으며,거기서 여기로 귀환하지 않고 허무로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한편 그림 9에서 15의 길은 광명으로 변용한 것이며,존재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다.역행하는 길로 돌아가려면,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차원을 상당히 낮추어야 한다.단, 가는 길일 때는 <시점의 방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무척 달라질 것이다.


단, 이 두 가지 선택은 <어느 쪽이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그 개체의 자유 의지로 선택 기준을 고르는 문제다.그 곳에 대오와 해탈 어느 쪽이 뛰어나느냐의 문제는 없다.


단순히 사라지는 것은 <마지막>이기 때문에 <최종> 해탈로 불리울 뿐,그것이 최종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다.대오와 해탈은 평행선을 달리는 다른 길이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비재(非在)가 좋은 사람은 그곳(無)으로 나아가고,존재가 좋은 사람은 그곳(존재存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점은 항상 <어느쪽이 궁극적으로 뛰어난가> <어느쪽이 최종적으로 높은 차원인가>를 말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대오와 해탈은 <다른 길>이기 때문에 서로간에 우열이 성립하지 않는다.마치 바다가 좋은가 산이 좋은가라는 정도의 차이밖에 안 된다.




단,무(無)에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특별한 의미에서의 <희소가치>가 분명히 있다.하지만 본인은 존재로부터 사라지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그런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무에 대한 가치 논의는 세상에 남은 사람이 논의하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거리일 뿐이다.사라진 자에게는 의미도 가치도 일절 관계 없다.


다만 무(無)로 사라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자격>이 필요하다.그것은 육체의 죽음에 즈음하여 존재를 100% 거부하는 것이다.물론,이것이 꼭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라.그 선택은 개인의 성질과 경험적 취향에 불과하다.


그러니 해탈과 대오의 어느 쪽이 궁극일까라는 어리석은 우열의 망상을 갖지 말고 우선 대오에 이르면 된다.당신은 그곳에서 질릴 때까지 깨달음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대오 또한 간단히 성숙해서 쉽게 끝나지는 않기 때문이다.거기에서 절대 무(無)의 저쪽 편이 어렴풋이 보이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또 깨달음의 광명에 한껏 도취되어도 몇 천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거기에 질렸을 때 처음으로 무(無)와 어떻게 만날 것인지,그곳으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그것을 당신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대오하지 않고 해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유치원 생도가 대학 수업에 참견하는 것과 같다.



선(禪)에서는 대다수가 제9~10도의 대오에서 멈추고 있다. 라즈니쉬풍으로 말하자면,그것은 <제6신체>에서 멈춘 것이다.
(펌자 주:위 도표의 8번을 지나서 다시 거꾸로 하강하는 길을 말함.신성에 취해서 술병을 들고 다시 속세로 내려오는 붓다들을 나타내는 선의 십우도 그림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것 같습니다.)


만약 그 앞의 제8도에서 하강 루트를 선택하지 않고 그 끝의 어둠을 본다면 그들은 쉽게 설법할 수 없다.더 이상 그곳에는 <존재를 위로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禪)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빨리 제8도의 지점을 통과해 버린다.8도의 지점에 멈추어 <비존재의 영역>을 확실하게 직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오자는 설법을 주저하지 않지만 해탈자는 설법하는 일에 주저한다.왜냐하면 해탈은 스스로의 소멸을 용인하지 않는 영혼과 어떤 의미에서 자아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영혼에게는 쉽게 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