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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3) 11:18-12:6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두 가지 관점 - 거시적과 미시적
예레미야서 2022. 3. 25. 00:06

본문은 비슷한 두 가지 이야기가 반복된다.

- 첫째 이야기가 11장 18-23절, 둘째 이야기가 12장 1-6절이다.

- 두 이야기 모두 ① 예레미야의 문제 제기, ②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 ③ 하나님의 응답 으로 이어진다.

- 그런 점에서 볼 때, 두 이야기는 독립된 단락이 아니라,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로 다뤄지도록 의도된 것이다.

- 그렇게 연결되도록 두 가지 이야기를 동일한 전개 방식으로 구성했다.

따라서 본문 해석의 열쇠는 두 이야기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이야기의 메시지가 상반된다는 점이다.

첫째 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는 '박해'이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것 때문에 살해 위협을 받는다.

[렘 11:19]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해치려고 “저 나무를, 열매가 달린 그대로 찍어 버리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렘 11:21]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나돗 사람들을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의 목숨을 노려서 이르기를 ‘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줄 알아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한다.

[렘 11:20] ・・・・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제 원수를 그들에게 갚아 주십시오. 제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 예고로 응답하신다.

[렘 11:23] 내가 아나돗 사람들을 벌할 때가 되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면, 그들 가운데서 살아 남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신다.

 

반면에 둘째 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는 '공정성'이다.

- 예레미야는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한다.

[렘 12:1~2]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2) 주님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불만에 깔린 전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받아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전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갖는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심판해달라고 기도한다.

[렘 12:3] ・・・・ 그러므로 그들을 도살할 양처럼 끌어내시고, 죽일 날을 정하셔서 따로 갈라내 두십시오.

- 여기까지는 첫째 이야기와 비슷하다.

- 예레미야는 문제를 느끼고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은 다르다.

- 첫째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도에 호응하신다.

- 악인을 심판해달라는 예레미야의 요구에 하나님은 심판하겠다고 응답하신다.

그런데 둘째 이야기에서는 예레미야의 요청을 거부하신다.

- 예레미야의 요구는 첫째 이야기와 같다.

- 악인을 심판해달라는 것이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신다.

그렇게 응답하신 이유는 악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렘 12:5]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 강의 창일한 물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 사람이 아닌 말과 경주해서 이기려면, 땅이 아닌 강물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 그래서 사람이 죄악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면,

- 어쩔 수 없이 불공정한 상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 용인하신다.

- 왜 그래야 하는지는 뒤에서 다루겠다.

 

그러면서 6절은 '친척의 배신 이야기'로 본문 전체를 하나로 엮으면서 끝낸다.

[렘 12:6] 그렇다. 바로 네 친척, 네 집안 식구가 너를 배신하고, 바로 그들이 네 뒤에서 소리를 질러 너를 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와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둘째 이야기의 관점에서, 심판받지 않고 형통하는 악인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할 악행 중 하나가 '친척의 배신'이라는 것이다.

- 이는 예레미야가 친척의 배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권면이다.

- 동시에 첫째 이야기의 관점에서, 결국 심판받아 멸망당할 악인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할 박해로 '아나돗 친척의 배신'을 예고한다.

- 예레미야는 친척의 배신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할 테지만, 결국 그 친척은 심판받아 멸망한다는 것을 예고한 것이다.

-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격려이다.

이렇게 친척의 배신을 통해 첫째 이야기와 둘째 이야기가 구분된 두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선 두 이야기를 나눠서 보자.

- 첫째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악인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악인에게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 그러나 둘째 이야기에서는 악인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 그래야 악인의 박해를 통해 말과 경주에서 이기고 강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일까?

- 악인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일까,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거시적 관점에서는 심판하지만, 미시적 관점에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 악인은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다.

-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심판을 향해 흔들림 없이 가고 있다.

- 심판으로 향하는 역사의 방향성은 확고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심판이 매 순간 즉각적으로 일어나진 않는다.

- 죄 짓는 순간 바로 멸망당하지 않는다.

- 그래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은 쉬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미시적인 관점 밖에 가질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주무시는 백치처럼 보인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능해 보이는 하나님을 조롱한다.

[렘 12:4]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실까?

만약 거시적 뿐만 아니라 미시적으로도 심판하신다면, 

- 그래서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신다면, 

-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쓸모없는 비판을 듣지 않으실 수 있고, 

- 또 사람들은 심판이 무서워서라도 악행을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볼 텐데 말이다.

- 그러면 좀 더 쉽고 빠르게 전도가 되고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조차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 우리도 종종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상황을 경험한다.

- 그럴 때마다 마음 같아서는 폭력, 거짓말, 협박, 회유 등 나쁜 방법까지 동원해서 상황을 공평하게 만들고, 악인에게 복수하고 싶다.

- 그래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공평하게 바로잡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생긴다.

- 그놈을 꼭 내 손으로 골탕 먹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웬만하면 참는다.

- 참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상황을 공평하게 바꿔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 내가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 악인이라 하더라도 복수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인이 형통하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해악을 가할 때가 있다.

- 그럼에도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신앙에 회의를 느낀다.

-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나? 어떻게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악인을 가만두시지? 라는 의문이 생긴다.

- 그러면서 내가 이러려고 신앙 생활했나? 하는 물음과 함께,

- 이런 무능한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하는지 의심이 든다.

그런 의심 때문에 신앙에서 멀어졌다는 사람 주변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 그만큼 심판 유예는 실질적인 문제이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심판을 유예하실까?

본문을 보기에 앞서, 같은 메시지를 갖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다.

- 알곡과 가라지 비유이다.

[마 13:24~30]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25)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28)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29)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이 비유 역시 거시적인 관점에서 심판하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심판의 시기는 추수 때, 즉 종말이다.

- 그때 가라지, 즉 죄인은 따로 모아서 불태워 버려진다.

그러나 추수 전까지는 심판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 그래서 밀 열매의 성장을 계속해서 방해한다.

- 이는 죄인의 악행이 종말 심판 이전까지 언제나 반복되며,

- 그로 인해 의인은 계속해서 고통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놔두냐?

- 밀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마 13:20] ・・・・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 구체적으로 말해서, 열매가 열려 추수하기 전에는 열매와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있다.

- 그래서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 즉, 죄인을 심판하려다가 의인에게 피해가 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삶에 적용하면,

- 의인도 죄를 범할 때가 있다.

- 그런데 그때 바로 즉각적인 심판이 집행되어 지옥행 결정이 확정되면, 의인이 가라지, 즉 죄인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생긴다.

- 반대로, 죄인도 회개하여 의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우리는 그런 사람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 그런데 회개할 잠재성이 있는 죄인이 첫 번째 죄를 지었을 때 즉각적으로 심판받아 지옥행 결정이 확정되면, 역시 의인이 죄인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을 유예하시는 것이다.

- 의인에게는 실수를 용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 죄인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 그래야 더욱 정확하게 죄인과 의인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시적 관점에서 심판과 미시적 관점에서 심판 유예가 갖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문은 심판 유예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의인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의인을 위한 '단련'이다.

- 의인이 말과 달려도 이기도록, 강물 속에서도 살 수 있도록, 

- 즉,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의인을 단련시키는 것이 심판을 유예하여 죄인을 즉각적으로 제거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 만약 세상에 죄인이 없다면, 그래서 의인이 위협받는 기회가 없다면,

- 의인이 의인으로 드러날 기회도 없다는 뜻이다.

- 따라서 죄가 존재할 때에만 죄인과 의인의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고,

- 그때에만 종말에 일어날 죄인의 심판도 분명해질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 죄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 세상에 죄가 있을 때만 죄인과 의인이 구분되고, 의인이 구원받는다.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죄가 의인을 구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담은 죄에 노출된 것이다.

- 에덴 동산을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곳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 죄는 처음부터 있었고, 아담이 그것을 드러낸 것이다.

- 이를 통해 죄인과 의인이 구분된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서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 의가 의로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의인조차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롬 7:13] 그러니 그 선한 것이 나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나에게 죽음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계명을 방편으로 하여 죄를 극도로 죄답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조차 죄가 있었다고 주장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반론이 있다.

- 이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조하실 때부터 죄를 만드셨다는 뜻인데,

-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실 수 있냐는 것이다.

- 죄를 만든 존재는 의로울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만드신 하나님은 의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형식 논리로만 보면 맞다.

- 그러나 문제는 의로움을 정의하는 것에 있다.

 

의로움을 공의롭게 질서가 완벽히 지켜지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 죄를 만드신 하나님은 의롭지 않다.

- 그런데 이러한 가정은, 여러 번 말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한다.

첫째로, 완벽한 질서를 추구하는 하나님은 창조할 수 없다.

- 창조는 너무 완벽해서 아무것도 추가할 필요 없는 하나님 안에 뭔가를 덧붙이는 불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창조는 질서 파괴이다.

둘째로, 죄가 만연한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 하나님이 죄를 만들지 않았다고 하면, 창조에 개입하여 죄를 만든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 그러면 하나님은 창조주의 지위를 잃는다.

- 반대로 하나님이 죄를 만들었다고 하면, 자기 부정이 된다.

- 질서의 하나님이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로움과 질서를 연결하는 생각은 틀렸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움을 사랑의 관계라고 정의해야 한다.

- 그래야만 사랑의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행위로서 창조가 설명된다.

- 그리고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는 잠재적으로 배신하고 반역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 하나님의 사람 창조 행위 이면에는 하나님의 죄 창조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렇게 의로움을 사랑의 관계로 정의할 때만 죄가 만연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셨고, 그 죄는 의인을 단련시킨다.

여기서 단련의 의미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첫째로, 말 그대로 금속을 제련하듯, 시련을 통해 본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 죄인의 박해를 겪으면서 죄의 해악이 얼마나 큰지 몸으로 이해하여 죄를 혐오하게 되며,

- 박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절박하게 구하게 된다.

- 그래서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 즉, 의로워진다.

- 둘째로, 시련을 통한 '시험'이라는 의미가 있다.

- 죄인이 박해할 때,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죄에 가담하지 않는지를 시험하고,

- 또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지를 시험한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을 구분하여 골라낸다.

 

이러한 원리 역시 친숙하다.

- 예를 들어, 군대에서 장교를 임관할 때에도 두 가지 방법을 다 쓴다.

- '시험'을 통해 미흡한 사람을 탈락시키고, 남은 사람만을 '단련'시킨다.

- 또 그렇게 '단련'시키는 과정 중에도 '시험'이 있어서 또 일부가 탈락한다.

- 이렇게 '시험'과 '단련'을 반복해서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만 장교에 임관한다.

왜 이렇게 하냐?

- 군인이라는 기준에 합당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이다.

- 그리고 군인이라는 기준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 그래야만 그 군인이 군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고 만약 100명 중에 군인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면, 

- 한 명의 결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 한 명 때문에 전쟁에서 100명 전부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 정말로 사랑의 관계라는 기준에 합당한 사람만 뽑혀야 한다.

- 그리고 사랑의 관계라는 기준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 그래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 그렇지 않고 만약 교회 공동체 안에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는 게임 이론을 통해 여러 번 설명했다.

- 완벽한 신뢰로 맺어진 공동체 안에 딱 한 명만 신뢰를 깨면, 공동체 전체가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동일한 과정이 천국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 사랑의 관계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딱 한 명만 천국에 들어가도,

- 천국의 천국다움은 순식간에 깨질 것이다.

- 서로 믿지 않고 의심하여, 모두 자기 이익만을 위해 싸우며, 연합하지 않고 합종연횡할 것이다.

- 만약 천국이 그렇게 된다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 그런데 이러한 비극이 딱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단련되어야 한다.

- 그리고 단련된 사람만 뽑혀야 한다.

 

이러한 단련이 어떻게 일어나냐?

- 죄인을 통해서이다.

- 의인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 때문에 죄인에게 박해를 당할 때이다.

- 그럴 때만 의인이 점점 더 의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 유예가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실을 들은 우리의 심정은 어떠한가?

암담하다.

-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악인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을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우리를 공격하는 악인은 여전히 형통할 것이고,

- 우리는 악인의 공격 속에서 괴로워만 할 뿐, 복수도 못 하고 발만 동동거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 우리도 결국 예수님처럼 무력하고 비극적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결국 악인은 심판받아 멸망하고, 의인은 구원받아 영생하게 될 것이다.

- 거시적 관점에서 말이다.

- 손에 닿지 않는 먼 미래에 말이다.

하지만 미시적 관점에서는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을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 종종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마음 안에서 가득 찰 때가 있을 것이다.

- 그래서 회복되어 용기를 얻고 신앙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회복일 뿐, 현실의 상황은 여전히 불공정하고, 

- '친척의 배신'과 같이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계속 당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신앙 생활이며 바른 인생이라고 말한다.

- 악한 세상 속에서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

- 예수님께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당할 때 가만히 계신다.

- 그래야만 바르게 의인을 구분할 수 있고,

- 의인이 단련되어 더욱 더 의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단련하시기 위해, 우리가 고난당할 때 가만히 보고만 계신다.

 

그런데 본문이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이다.

과연 심판을 유예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 이것이 11-13장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지난 본문에서는 죄로 심판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하나님은 애달파 하셨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멸망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며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하셨다.

- 마치 자녀가 아파할 때 자녀보다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심정일까?

- 두 가지 때문에 괴로우실 것이다.

첫째로, 악인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시며 괴로워하신다.

- 하나님을 떠나 멋대로 사는 악인을 보시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고 싶어 하실 것이다.

- 하지만 의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인을 단련하기 위해서 심판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우실 것이다.

- 이는 예레미야가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며 보이는 답답한 심정에서 잘 나타난다.

-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괴로운 심정을 간접적으로 보이셨다.

둘째로, 악인에 의해 고통받는 의인을 보시며 괴로워하신다.

-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의인이 고통당하는데, 어찌 하나님이라고 괜찮으시겠는가.

- 게다가 의인의 박해가 하나님 때문이기에, 하나님은 더 괴로우실 것이다.

- 특히 고통당하는 의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셔야 한다는 사실도 하나님을 애달프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괴로움을 해소하지 않고 인내하신다.

-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여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면, 당장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능히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고 단련하기 위해 괴로움을 마음에 품으신다.

- 예레미야가 친척에게 배신당할 때도 하나님은 인내하셨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하나님은 괴로움을 삼키셨다.

이것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비애이다.

 

결론 - 하나님의 심정에 공감하자.

본문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박해받는 현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 그렇게 불공정한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본문은 위로를 준다.

- 겉으로 보기에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무력해 보이지만,

- 실상은 그것이 우리를 보호하고 단련하시려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를 위로하는 것에 있지 않다.

-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하는 것에 있다.

- 심판을 유예해야 하는 하나님의 괴로운 심정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 그래서 괴로워하시는 하나님께 공감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 우리도 공감받을 때 위로가 되듯, 하나님도 우리의 공감을 통해 위로받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본문은 우리를 위로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로하냐?

만약 본문이 우리를 위로하면, 우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으로 상황은 끝난다.

- 마음이 편해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 다시 내 일에 집중한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공감하게 하면,

- 그래서 하나님이 괴로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 그 괴로움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 우리 마음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머물게 된다.

괴로움까지 감수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감하면 할수록, 

-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 깊이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받고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다.

-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을 떠난 경험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깨닫고 공감하는 것이다.

- 그래야만 우리가 위로받고 문제가 해결되어도, 여전히 하나님 곁에 머물 수 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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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23:32:21 (*.35.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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