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나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사이로 내 에너지는 흐르고 있으며,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강의가 아닙니다. 나는 특정한 에너지(정보와 함께)를 전하고 있으며, 나와 파멜라 그리고 게릿처럼, 여러분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함께 함으로써, 이 방 안에, 즉 지구와 연결된 이 장소에, 에너지의 장 혹은 에너지의 소용돌이(vortex)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소는 신성한 곳입니다. 사람들, 즉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천사들이 지구에 자신들의 빛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함께 모여 있는 모든 장소들에서는, 땅이 신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아주 대중화된 채널링 현상에 대해, 나는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요가와 동양철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프라나(prana)라는 개념에 대해, 여러분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프라나는 영적인 에너지로서, 호흡을 할 때마다 들이마시게 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여러분은 숨을 들이마실 때, 단순히 산소만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뛰어넘어, 여러분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력의 에너지를 들이마신다고 합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숨을 쉴 때, 산소와 함께 프라나를 들이마시게 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채널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채널링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몇몇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채널링입니다. 아시다시피, 우주의 에너지가 없다면, 여러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주의 에너지를 흡입하지 않고는, 존재 및 살아갈 수도 없으며, 번창할 수도 없습니다. 산소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여러분이 생겨난 본원(本源)인 우주의 에너지와 연결되지 않고는, 초보적인 기능조차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지구와 우주, 산소와 프라나 등, 모두가 지구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인간으로 나타내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앞에서의 채널링에서, 나는 여러분을 문지기, 즉 지구에 더 많은 빛을 가져올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또한 다리를 놓는 사람들, 즉 우주와 지구를 사이를 중재하고, 우주의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며, 기쁨과 목적의식 그리고 건강함을 느끼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직관을 사용할 때마다, 그리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그러한 상황들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를 인식할 때마다, 여러분은 채널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상위자아와 통로를 만듦으로써, 여러분이 여기 지구에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구가 아닌, 우주의 지혜와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어떤 식으로든, 시공간을 벗어나 있는 더 큰 존재와 다시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다 함께 우주의 에너지와 교신(채널) 함으로써, 이 우주의 에너지가 이 새 시대의 지구 속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새 시대는 더 이상 미래의 비전이 아닙니다. 새 시대는 벌써 수많은 개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 시대가 표방하고 있는 각성(일깨움)은 정부, 단체 및 기관들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새로운 흐름은 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슴의 흐름이 여러분의 마음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밝고 가벼운 마음과 지혜에 따라 살고, 행동하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개인들이 가슴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새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모든 실질적인 변화 혹은 변형의 기본적인 토대는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눈을 뜨게 된 에너지들은 에고에 기초한 의식이라는 낡은 틀을 고수하고 있는 단체와 기관들로 점차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보호막이 되었던 권력이라는 낡은 보루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슴의 부드러운 에너지에 의해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가슴이 지휘권을 넘겨받게 되면, 낡은 것들은 힘과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새 시대에는 관계들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커다란 기쁨에서부터 깊은 고뇌에 이르기까지, 관계들은 가장 깊은 감정들의 원천이 됩니다. 관계들 속에서, 여러분은 내면의 고통을 인지하게 될 수도 있으며, 본질적으로 이러한 고통은 관계 그 자체보다 더 오래된, 심지어 여러분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관계 분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자 마음이 생기게 되며, 대개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에너지로 인해, 관계에서의 파괴적인 요소들을 여러분과 상대방 간의 긍정적이고, 공평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변형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치유와 개인적인 변형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들을 여러분이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 말은 여러분이 누군가를 몹시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기 내면의 길이 여러분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에, 작별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든, 아니면 헤어지든 관계없이, 이러한 개인적인 유대 분야에서, 여러분은 가장 깊은 주제들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새 시대를 나타내는 가슴의 외침, 즉 가슴에 기초한 에너지는 이미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으며, 여러분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관계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을 수가 있으며, 삶이 엉망진창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분의 영혼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고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아주 오래되었으며, 이 번의 생보다도 훨씬 오래된 고통으로, 이전의 지구에서의 모든 생들보다도 더 오래된 고통들입니다. 영혼으로서 여러분이 겪었던  최초의 고통으로 여러분을 다시 데려가고자 합니다.


아주 먼 옛날, 모든 것은 온전했으며,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상상할 수 있나요? 잠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해봅시다. 단지,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육체 속에 있지 않으며, 순수한 의식으로, 안락하게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의 장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단일체의 일부로서,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편안한 담요처럼, 이러한 에너지의 장이 여러분을 에워싸고 있다고 느껴보세요. 이러한 풍요로운 사랑의 에너지 덕분에, 자기 자신 혹은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본래의 권리를 의심하지도 않고, 마음껏 탐구하고 발전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두려움이나, 불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편안함과 안전감은 개별 영혼으로 생겨나기 이전에, 여러분이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 그곳은 우주의 자궁이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여러분의 현재 상태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가슴은 지금도 이러한 완전함과 온전함, 다시 말해 사랑과 자비심이라는 담요 속에서 여러분이 체험했던 절대적인 안전감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는 하나됨(oneness)이라는 느낌이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담요 속에서, 여러분은 다 함께 하나님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 혹은 사랑의 담요 속에서, 어느 시점에 이르자,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 즉 하나가 되어 있던 자각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었다고 상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체험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수한 존재라는 온전함으로 완전히 흡수될 때, 여러분은 그야말로 어떤 것도 체험하지 못하게 되며, 단지 여러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상태, 즉 황홀하고, 전적으로 안전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주적인 자각을 지니고 있던 하나님의 일부는 탐구하고, 진화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부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여러분의 의식은 하나가 되어 있던 단일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라는 독립체, 즉 정의상 개별 의식이 되는 실험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도약이었습니다.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여러분은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창조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renewal)에 대한 열망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염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가 되어 있던 상태로부터 실제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아픔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 최초로 깊은 아픔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사랑과 안전이 충만했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했던 탄생의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황량함이라는 이러한 최초의 강렬한 체험을 하는 동안에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괜찮아, 이건 너의 선택이었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여러분은 존재의 바깥층들에서 혼란을 겪었으며,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면에 존재하는 더 깊은 앎, 즉 여러분이 하나님이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적인 측면과 교감하는 것이 아주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면의 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당시에 생겨나게 되었으며, 고통을 받았던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영혼, 즉 독특한 개체성은 내면에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신성한 앎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충격을 받은 우주의 아이라는 양극단들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이, 그리고 앎과 체험을 통합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별 영혼으로 출발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되는 것, 즉 정의상,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사하고, 체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Godself)의 일부를 영혼(Soul)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영혼(soul)은 자신의 신성한 기원들을 다시 찾기 위해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영혼은 진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해 하나님을 느끼기 위해, 살아서, 체험하고 찾아내고, 스스로 파괴하고, 다시 창조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이라고 여겼던 하나이며, 온전하다는 느낌은 산산조각이 났으므로, 체험을 통해 되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그 자체는 창조력이 지니고 있는 커다란 재주입니다. “나”라고 하는 의식이 탄생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됨과 깊은 일체감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여러분은 종종 “나”라는 경계를 벗어나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탐구의 목표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기적이 되게 하는 것은 “나”다움, 즉 분리에 있다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개별 영혼이라는 기적 속에서, 무한한 아름다움과 기쁨 그리고 창조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여전히 영혼으로 태어났던 고통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태고의 고통과 배신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어머니로부터, 즉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사랑과 안전감이라는 담요로부터, 찢어져 나오는 기억입니다.


시간과 체험을 통한 여정에서, 여러분은 아주 많은 것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온갖 종류의 형태들로 육화했었습니다. 인간의 몸이 아닌, 다른 형태로도 아주 많이 육화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긴 역사를 통틀어서, 두 개의 다른 동기들에 의해 여러분이 이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탐구하고, 창조하며, 쇄신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향수, 즉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으며,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부분, 즉 여러분을 우주의 자궁 밖으로 밀어냈던 그 에너지로 인해, 여러분은 많은 것들을 체험하고 창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지니고 있는 탄생의 고통과 향수로 인해, 여러분은 또한 많은 트라우마와 환멸을 느껴 왔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항상 자애로운 것들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시공간을 통해,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나중에는 후회했던 것들, 즉 “나쁜(bad)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행위들은 체험 속으로 뛰어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것들을 탐구하고자 했던 결심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아시다시피,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 자명했던 하나됨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여러분이 빛만을 체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든 것들을 찾아 나서야만 합니다. 따라서 어둠도 또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양극단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화의 현시점에서, 여러분은 모든 것이 진실로 “나”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답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자각으로부터, 기쁨과 풍요를 체험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주에서 태어나는 순간, 즉 고독감과 고통에 휩싸이는 순간, 여러분은 자신이 왜소하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자신을 구해줄 뭔가를, 즉 외부에 존재하는 권력 혹은 힘, 신(神), 지도자, 파트너, 아이 등등을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현재 체험하고 있는 깨우침의 과정 속에서, 여러분이 동경하고 있는 본질적인 안전감은 그것이 부모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신(神)이든, 외부의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경과 향수가 특정한 관계 속에서, 아무리 강하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본질적인 안전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전통에 따라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지금도 여러분의 인식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바깥에 존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길을 제시해주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적인 하나님의 일부로서,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으며, 모든 것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탄생이라는 원초적인 상처로부터 자기 자신을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탐구하고, 쇄신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에너지는 남성적인 에너지인 반면에, 통합하고, 함께 모으는 에너지, 즉 고향의 에너지는 여성적인 에너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참된 여러분의 본질은 이러한 에너지들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영혼으로서, 여러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남성이면서, 또한 여성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요소들을 지닌 채,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두 에너지들이 조화를 이루어, 이제 함께 일할 때가 왔으며, 이 말은 진실로 자신 속에서 온전함을 체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나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부정해온 끝에, 여러분은 자신이 동경하고 있는 하나님이 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비약적인 도약이 될 것이며,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이 갈망하고 있는 하나님이라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힘과 온전함의 중심으로 여러분을 데려다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만이 할 수가 있으며, 여러분은 그러한 존재이며, 언제나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참된 자신)을 기다려 왔으며,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