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제3의길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예수아이며,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의 장벽을 건너, 나는 여러분들 옆에 서 있습니다. 가슴으로 나를 느껴보세요. 나는 인간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속속들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이 느끼는 느낌의 전체 영역과 그러한 느낌의 양극단들을 내면에서 살펴보았으며, 결국에는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어떠한 길을 찾아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되는 체험을 다른 시각에서, 즉  가슴속에서 평화와 평온이 생겨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것이 바로 이러한 방식, 이러한 길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딜레마,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현재의 자신보다 더 좋아져야 하며,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보다 더 발전해야 하며, 자신을 위해 지니고 있는 더 고차원적인 이상(理想), 즉 어떠한 원칙들을 더 경건하게, 그리고 더 잘 따를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이상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여러분이 좋지 않다고 하는 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달라져야 하며,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써야 한다(have control over)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과 인간성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철학 및 종교적인 전통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리 정해놓은 세계관에 자신의 인간성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도덕적인 원리,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고차원적인 원리들에 기초하여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성이라는 그러한 가면 뒤에는 우선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삶을 통제하려고 하게 되며, 이와 동시에 이러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중심으로 주위에 온갖 형태의 관념들이 쌓이게 되며, 이러한 형태의 관념들이 마치 선(善)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세계관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Power)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으로 인해, 여러분이 모든 인간들 속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에 취해, 여러분은  삶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환상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삶은 그런 식으로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이나 의지에 따라,  길들여지고, 따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억누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삶은 어떠한 세계관이나, 체계에 맞도록 맞추어질 수가 없으며, 또한 정신적인 과정에 기초하여 체계화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자신의 인간성, 즉 인간적인 상황과 싸움을 벌여 왔습니다. 많은 영적인 길들에 따르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공(功)을 들임으로써, 스스로를 향상시켜야 하며, 잘 준비된 행동 계획을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여러분이 이상적인 상황으로 인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많은 내적인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만약 요구되는 이상적인 상황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내면에서 충족(만족) 시키지 못하거나,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기준들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게 될 것이므로,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에너지, 즉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에너지를 지금 느껴보세요. 다시 말해, 강요하려는 욕구로부터,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추구로부터, 그리고 삶과 자신의 감정, 그리고 생각들을 체계화하려는 욕구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매사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그것이 사랑스러운 에너지인가요? 대개 이러한 에너지는 사랑, 선한 것, 그리고 진실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권력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게 되며, 따라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더 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은 자신의 얼굴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은 사고(생각)를 통해 유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삶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여러분에게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현재 속에서, 지금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살펴보세요. 아직도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나요? 다시 말해,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 그리고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 흐르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원망하나요? 이처럼 판단하는 상황 속에는 비난하는 에너지, 즉 “이것은 존재해서는 안 돼, 이것은 잘못된 거야, 이것은 없어져야 돼”라고 하는 차가움(냉정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이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나요?

나는 이제 여러분을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곳으로, 즉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고, 또한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도 않으면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한 가지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삶에서 분노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뭔가가 -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분노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감정들을 되돌아보는데 익숙치 않아, 여러분의 반응이 원초적이라면, 거기에는 오로지 분노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화가 날 때까지 날 것이며, 그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은 분노에 휩싸이게 되며, 분노와 동일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대개 분노의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려고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비난의 화살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화가 났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원초적인 반응으로서, 여러분은 자신의 분노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내가 두 번째의 반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화가 나게 되면, 곧바로 머릿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이건 잘못된 거야.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아, 나는 이 화를 억눌러야 해”라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혹은 사회적인 관점에서, 이와 같이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고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화를 내는 모습을 타인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좋고, 더 멋지며, 도덕적으로도 더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여성에게도 분명히 적용이 됩니다. 다시 말해,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여성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개념들에 속아서, 자신이 지닌 분노를 판단해 왔던 것입습니다. 그러면,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여러분의 내면에 분노가 존재하므로, 곧바로 분노에 대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걸(분노를) 허용해서는 안 돼, 이건 잘못된 거야”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는 여러분의 어두운 측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글자 그대로 빛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그러한 분노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분노가 억눌리게 된다면, 분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분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등 뒤에 숨어서, 분노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여러분을 초조하고, 불안해 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분노 속에 존재하는 힘을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자신의 달콤하고, 멋지며, 도움이 되는 측면은 보여줄 수가 있지만, 자신의 열정적이고 화내는 측면, 즉 반항적인 측면은 보여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노는 갇히게 되고, 이러한 느낌을 지니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타인들과 거리를 두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감정을 억누름으로써, 여러분의 내면에는 두 개의 자아들, 즉 밝은 자아와 어두운 자아 간에 심한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통스러운 게임에 사로잡히게 되며,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내면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판단입니다.

이렇게 반응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정말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걸까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이상적인 사람, 즉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됨으로써, 이러한 형태의 반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말해 진정한 평화 및 내적인 균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자주,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그러한 감정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도덕적인 기준들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곰곰이 살펴보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기준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그러한 기준들이 여러분에게 주입되었는지를 되새겨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살펴보도록 촉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이상적이고, 때로는 아주 고차원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should do)들”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fire at yourself) 판단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하지만, 그러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감정의 고삐를 죈다고 해서, 그리고 체계적으로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