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안의 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쌓아온 기억들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 자아. 전체가 분화된 의미 즉 자신이라는 "나"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계에서는 나가 존재하질 않았다.

시작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시공간 모든 존재하는 모든것을 인식하는 전체성만이 존재했고,

그 전체성이 더 세밀하고 구체화되었을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나가 공간이 되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게 되었다.


즉 예를 들어 자신이 지금 움직이는 몸은 빈 공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

자신의 몸이 빈공간이고 공기를 비롯한 인식하는 모든 것이 꽉찬 존재공간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써 생명으로 부터 시작되어 자아는 나가 아닌 너로부터 시작된 너에 대한 나의 기억이

다.  내안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다.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



즉 자신의 경험과 모든 관계는 모두 너와 나의 상대성 안에서

쌓아올린 체험이며, 내안의 모든 표현은 순간 순간 받아들인 모든 당신의 것들을 조화안에서 표

현한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주관이 되었다. 즉 주관이 보통의 자신안에서 떠오른 주관이 아니라

는 이야기다.

그 안에서 그 전체성안에서 자신의 빈공간이 자신이라 불리워졌을때는

그안에서 선택한 공간안에서 먼저 바라보게 되는 전체성의 관점에따라 근원을 형성하게 되어

서로 다른 근원이 연원이 되었고, 또 자아의 이동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체성이 변화게 되어 자신이 최초로 인식한 최초의 근원안에서 여러 근원들이 순차적으로

흐르게 된다. 즉 모두 같은 근원이지만 자신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고,

그 차원또한 인식하는 이에 따라서 가장 근원으로 보일 수도 있고, 가장 낮은 근원을 이루고 있

을수도 있는 것이다. 즉 어차피 모든 경험을 기준으로 돌고 돌기에 모든 순간은 전체안에서 같

은 것이지 높낮음은 의미가 없다. 또한 근원이라는 의미조차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자아라는 것은 "나는 움직이고 있다"에서 자아의 개아가 사라지게 될때

"움직이고 있다"가 된다.

즉 존재계는 "하고 있다" 로 완결되는 것이지 그 앞에 "나"가 붙지 않는다.

"나는 하고 있다"라는 인식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가 전체라는 인식하에서의 나또한 자신이 인식한 범위이지 "함"은 아니다.

어떠한 순간이든 나 라는 것이 들어갈때는 상대적인 공간안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순간이든 오해와 분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다"라고 외치는 순간에도 말이다.



지금은 "나"라는 잣대 위에 뜻을 세워 자신을 넓혀 가기 보다는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 "너"라는 모든 "너"안에서 절대존중속에서의 완전한 믿음으로써

그에따라 흐르는 신념으로 자신의 잣대를 세워야 한다.


즉 나의 뜻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닌 당신에 대한 나에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