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사철학(歷史哲學)과 현대문명(現代文明)에 대한 일고(一考) [대학졸업논문]


          서언(序言)

Ⅰ  역사철학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1)  역사철학의 의미(정의)
    2)  역사철학의 목적

Ⅱ  우주와 역사에 대한 순환론(循環論)

    G. E. Cairns의 Philosophies of History

    1)  우주순환론(宇宙循環論)
    2)  대일환론(大一環論)
    3)  문화순환론(文化循環論)
    4)  결론 : G. E. Cairns의 견해

Ⅲ  현대문명의 위기(危機)

    1)  위기의 몇 가지 원인
    2)  로마클럽의 견해

결론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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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언(緖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자연(우주)의 의미, 사회의 의미, 인간존재의 의미 등 우리 인간이 보고 느끼는 본질을 깨우쳐 알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이한 본성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순간순간에 끊임없는 행동의 선택, 도덕적 선택을 행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 이후에 구체화된 성질이나 일단 인간이 자연에 능동적, 능률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된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그들의 인식대상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대상의 배후에 있을 어떤 초인간적 의지나 그것을 지배하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여 왔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원시적 종교로서 형성되었다가 이어 논리적-직관적 인식에 의한 철학적 사유(思惟)의 과정과 다양한 고차원적 종교의식의 과정을 거쳐 확대 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인식원리와 역사적 인식원리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정신적, 학문적 노력은 반드시 어떤 목적의식 하에 진행된다. 목적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지적 특성 특히 미래에 대한 방향감각을 확립하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래를 의식하는 인간은 그들의 모든 행위와 생활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해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本稿)의 취지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적 탐구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온 우주(자연), 사회 그리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여러 가지 해결책- 인식체계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현재 인류가 처한 위치를 확인해 보고, 미래의 방향 설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의 이상적인 원칙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며, 현재 심각한 위기의식 하에서 평가되고 있는 현대문명의 여러 가지 난제를 밝혀보고 그 해결을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하에 나는 먼저 오늘날 큰 관심 하에 논의되고 있는 역사철학에 대하여 그 의미, 가치 및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인류역사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몇 가지의 세계에 대한 역사철학적 인식을 생각해 볼 것이며, 이어 흔히 위기로서 평가되는 현대문명의 몇 가지 난제와 그것의 해결에 필요하다 생각되는 원칙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상 많은 가치기준에 대한 결정적 단안(斷案)이 행해져 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결단은 상대적인 것이었다고 믿어지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아직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다는 믿음에서, 또한 모든 사유에는 항상 종합적 판단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는 이와 같은 구상을 하게 되었던 바, 이하에 서술하는 모든 논의는 단지 참을 향한, 보다 밝고 맑은 미래를 향한 조그마한 의지로서 평가되어지기 바란다.



Ⅰ.  역사철학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1.  역사철학의 의미 (정의)

        1) 역사철학이란 용어의 기원과 개념의 변천

  역사철학이란 어떠한 학문인가를 밝혀 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그것이 사용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철학은 서양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학문의 일 분야로 콜링우드(R. G. Collingwood 1889-1943)의 분류에 따르면 역사철학이라는 명칭은  
  (1)  18세기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1694-1778)에 의해서 창시 되었는데, 그의 역사철학이란 말은 비판적 또는 과학적 역사학을 의미하는데 불과하였다.  즉 역사가가 고서(古書)에서 발견한 모든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이 결단을 내려서 얻은 역사적 사고의 일형식(一形式)을 의미하는데 불과하였다.
  (2)  18세기 말 헤겔과 그 밖의 저술가들은 이 명칭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보편사(普遍史) 또는 세계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3)  19세기의 몇몇 실증주의자들에게 역사철학은 역사가가 상술(詳述)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제사건의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일반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한편 제사건의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일반법칙을 발견한다는 실증주의자들의 견해는 ‘인류문명에 있어서의 견실한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과, 과학적 지식의 정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역사철학에 대하여 콜링우드는 ‘법칙과 가정의 복잡한 체계에 따라서, 자료를 해석한다는 과정을 거쳐 추리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역사학적 인식론에서는 이러한 제법칙과 제가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또 그 제법칙과 제가정이 어느 정도로 필연적인 것이며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야’되는데도 불구하고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것을 모두 무시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무의지적 인과법칙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비역사적세계’와  ‘인간의 정신력의 발현인 유의지적 정신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적 세계’를 구별한 콜링우드의 견해의 일면으로서,  이러한 콜링우드의 견해는 서양의 철학적 전통이 중세의 신학 중심에서 16-19세기의 자연세계의 보편적 원칙에 대한 관심을 거쳐, 드디어 역사 전개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의지- 인간정신의 역할을 중시한 현대역사철학에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2)  역사철학에 대한 정의

  역사철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선 우선 역사의 본질(대상, 방법, 가치)은 무엇이며, 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역사에 대해  역사란 무엇인가? (本質)/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對象)/  그것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方法)/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價値)/ 라는 네 가지 명제 하에 역사를 분석한 콜링우드의 견해를 통하여 역사에 관한 이해에 접근해 보겠다.

콜링우드는 먼저 사고(思考)의 한 특수형태로서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음의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인물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 그 해답자는 이와 같은 형태의 사고에 대해서 경험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즉 그는 역사가이어야 한다.  제 2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란 역사적 사고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그는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이기도 해야 한다.’

  이상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후에 콜링우드는 위의 네 가지 명제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가) 역사학의 정의(定義) :  과학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고의 형태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구성된다.  따라서 미지의 사물에 대한 일종의 조사 또는 연구인 역사학은 일종의 과학이다.

  나) 역사학의 대상 :  역사학이란 인간행동의 과학 즉 과거에 행하여진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이다.

  다) 역사학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  역사적 과정 또는 방법은  현재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역사가가 이에 대해서 사고함으로써 그가 과거 사건에 대해서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기록문서, 즉 증거의 해석으로 진행한다.

  라) 역사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  역사학은 인간의 자아인식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개인적 특성, 즉 타인과 자기를 구별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사학의 가치는 그것이 인간이 무엇을 해 왔는가?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데 있다.  

  그러면 이어서 철학(哲學)의 본질에 대한 F. 그레고와르(Francois Gregoire)의 견해를 검토해 보겠다.

  그레고와르는 철학에 대하여  “철학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맛인데, 그렇다고 하여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이거나 또는 교수(敎授)해서 전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철학의 특성을 논하면서  ‘철학자로서 존재함이란 보편적인 것으로의 종합이나 통일을 위한 꺾을 수 없는 근본적 경향에 의하여 지배되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리하여 세계의 여러 가지 국면들에 대한 통일되고 동질적인 비전으로 나아가려는 열망과, 좀 더 깊게 말하면 세계관에서 연역(演繹)된 인생관과 규범(規範)에 대한 전체적인 연관성에 이르려는 열망에 의하여 철학자의 존재가 압도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그는 계속해서 ‘철학이란 낱말의 중심개념은 전체적인 체계로 향하려는 노력의 개념, 통일적이고 반성적인 인식 같다.’는 ‘파로디’의 견해와  ‘철학 속에는 두개의 상이한 요소가 하나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즉 참에 대한 사변적(思辨的) 인식과, 인간 운명의 문제에 대한 견고한 실천적 해결, 한마디로 철학은 사유된 확실성 위에 근거한 성격과 삶의 규칙이다.’라고 말한 ‘브롱델’의 견해를 서술했다.  그는 또 철학적 사유의 세 가지 과정으로서의  ㄱ) 과학철학  ㄴ) 일반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形而上學)  ㄷ) 도덕철학의 세 문제에 대해 논했다.        

  이상 역사에 대한 콜링우드의 견해, 철학에 대한 그레고와르의 견해를 서술하였는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와 철학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형성된, 역사철학(歷史哲學)에 대하여 보다 바른 이해에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지는 바, 본인의 비견(鄙見)으로는 역사철학이란 역사적의식(歷史的意識)과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思惟)가 서로 밀접한 상호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世界-自然과 인간의 현존(現存)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각에서 통일시켜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역사적 의식 하에 성립된 새로운 형태의 철학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끝으로 콜링우드의 역사철학에 대한 정의와 역사철학 연구의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두 단계에 대한 논의를 기술(記述)한다.    콜링우드는 ‘유기화(有機化)되고 체계화 된 역사연구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생성되는 철학적 제 문제(諸問題)에 대한 연구’를 역사철학이라 정의 했으며,  그 연구의 진행과정의 두 단계로서  첫째 철학에 있어서 고립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역사철학도 철저한 고립적 상태에서 어떤 특수 문제에 대한 특수 연구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과  둘째로 이 역사철학이라는 철학의 신 지파(新支派)와 구 전통적인 제 학설과를 연결시켜야 될 것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2.  역사철학의 목적  

  
  ‘역사철학자는 과거에 일어난 것에 관한 그의 지식을 인간의 운명의 모든 신비를 푸는데 이용하려 한다.’고 크레인 브린톤(Crane Brinton)은 말했다.  또 최재희씨는  ‘철학으로서의 역사철학은 한갓 과학적 차원에 만족할 수 없고  초역사적(超歷史的), 초과학적(超科學的)으로 종합적, 통일적 인식을 갈구-모색하려고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역사과학,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의 경험과학을 무시하지 않고 이런 과학들의 성과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철학은 ‘미래의 인류사에 대해서 그 어떤 방향을 시사하고, 이로 인해서 현재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크레인 브린톤은 역사철학의 목적에 대해 논하면서 ‘하나의 완결된 역사철학은 모든 큰 문제들, 즉 좋은 생활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은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앞으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망은 어떠한 것인가?  요컨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최종적인 답을 내리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검토하여 보면  역사철학은 과거에 있어서 종교, 철학이 수행하여 온 역할을 대신하려는 역사적 의식 하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형태의 철학으로서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인식의 완성과 인간의 위치와 본질에 대한 규명(糾明)을 통하여, 인류의 가치기준을 재정립하고 앞으로 인류가 추구해야할 목표를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Ⅱ.  우주와 역사에 대한 순환론(循環論)

     Grace E. Cairns의 'Philosophies of History'를 통한 접근

  과거의 인간들은 어떻게 세계를 이해했으며, 어떻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였는가에 대하여 고찰(考察)하여 봄은, 오늘날 인간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하며 동시에 필요불가결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인류의 문화는 인간이 언어를 발명하고 농업과 가축사육의 괄목할만한 기술적 진보를 이룩한 이래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여 왔으며, 지금까지 5,000여 년의 역사시대를 통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그들의 지적 기술적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매우 다양한 세계관을 형성하여 왔던 바, 그러한 여러 가지의 세계관에 대한 체계적, 종합적 인식은 현대의 사상가들 특히 역사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이 추구하는 극히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제 겨우 역사철학이라는 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본인으로서는 이미 개척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마땅히 취해야 할 과정이라는 생각에서 케언즈가 지은 'Philosophies of History' ( 이성기 譯 ‘동양과 서양의 만남’)를 통하여 일차적 이해에로 접근해 보고자하며, 본고(本稿)의 구성상의 제한으로 인하여 단지 케언즈의 순환론의 분류와 그의 관점, 그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대한 결론 부분을 중심으로 극히 간단한 서술에 그치려 한다.

  케언즈는 먼저 ‘인간의 역사 혹은 우주적인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자신의 연구가 그 중의 한가지인 순환적인 역사관에 대한 고찰임을 밝혔다.  다른 두 가지의 방법은  1) 진보사상과  2) 회의적(懷疑的)인 역사관으로  진보사상은 ‘인류가 끊임없이 규정되지 아니한 미래를 향해서 직선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개념이며, 회의적인 역사관은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의미와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케언즈는 그의 순환적 역사개념의 유형(類型)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1) 우주순환론  2) 일환론  3) 문화순환론 들이다.  이하에서 그의 순환론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검토한다.

    1)  우주순환론(宇宙循環論)

  우주순환론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들의 기원은 인생의 생사의 주기와 뱀이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 것과, 태양과 달의 주기를 관측하게 된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설을 창안해 내는 사상가로서의 인간은 곧 철학적인 우주순환관을 발전시켰다.

  가) 인도인의 순환관  :  인도인의 사상은 더욱 신화적인 형식과 더불어 시작하는데, 그것은 힌두교의 시바(Shiva)의 우주적인 무용과 요가의 교리와 건축양식  그리고 화단의식(火壇儀式 -fire altaritual)과 같은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사상에서도 유사한 상징적인 방법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다라(曼茶羅 -mandala)와 보로부두르(Borobudur)인데  만다라의 가장 일반적이며 중요한 특징은  의미에 있어서, 전체 우주에 대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 도해형식(圖解形式)으로 풀이된 가시적인 표상이라는 점이며, 기능에 있어서 그것의 목적은 구도자를 이 우주적인 실재와 재수렴(再收斂)시키는 것이다.  불교의 건축 가운데 석조(石造) 만다라 즉 보로부두르는 인간과 우주적인 역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계시(啓示)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며 기념비적인 증거이다.  만다라의 근본 주제는 다시 마야, 요가, 요가 철학의 순환적인 시간에서 나타나는데 이들 요가철학에서는  1) 자신을 사람과 우주적인 실재와 재수렴 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층심리적인 요구에 대한 문제해결과  2) 인간으로 하여금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실재와 더불어 해조(諧調)를 이루게 하고 총화를 이루게 하는 시간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  중국의 유기적 순환사상  :  중국의 사상도 역시 토착적인 형식에 있어선 정신적인 자유에 크게 역점을 둔다. 이러한 사상은 전체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유기적인 관점으로부터 접근되었으며, 인간은 전체유기체 즉 자연 그 자체의 대우주에 대한 부분이 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전체적인 유기체의 한 유기적인 부분으로서 인간은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연의 균형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계절적인 순환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또 계절적인 순환은 음양(陰陽)의 법칙과 우주내의 수많은 다른 제 현상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자유란 개인이 인간사회와 자연과 조화 있는 총화를 이룰 때에 존재한다.  도교(道敎)에는 신비주의적인 요가 형식의 철학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이 신비주의적인 철학에 있어서 구도자의 목적은 존재의 본래적인 근원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과 신비적으로 연합하므로 서 가능한데 이것은 중국의 철학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  희랍과 로마세계의 신화적인 순환관  :  희랍과 로마세계에 있어서는 영원히 회귀(回歸)하는 우주적인 순환이라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친숙한 방법이었다. 그들 사상의 신화-상징적인 해석과 자연철학적인 해석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기에 중요하며, 종교에 있어서 황금시대와 신동(神童-구세주)에 대한 사상은 배화교도와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비슷한 사상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과학에 있어서 희랍인의 견해는 역사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근대의 과학적인 방법들의 시조가 되며, 또한 현대의 우주와 인간역사에 대한 과학적인 순환사상의 시조가 되고 있다.


    2)  인간 역사의 대일환론(大一環論)

  가)  배화교도(拜火敎徒)   :  배화교도의 사상에 있어서 역사는 절대의 시원(始原)과 종말을 가진 한번의 유일한 대희년(大喜年)이다. 그것은 정복(淨福)의 황금시대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아리만과 그의 악령들이 의(義)와 순결과 질서 그리고 진리를 파괴시키려고 세상에 들어오며 악마의 세력과 전투를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인간을 돕고자 종교를 가져온 구속자 메시아 조로아스터가 출현함으로써 도래된다. 조로아스터의 3인의 아들들은 그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할 때 까지 인간을 계속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금시대가 다시 존재하게 되며 오로지 이 시대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화교도들의 사상은 에덴에서 시작하여 황금기와 신국(神國)에의 복귀로 끝나는 히브리-기독교도적인 대순환 사상과 많은 공통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나)  히브리-기독교의 일환관  :  히브리 -기독교의 사상은  1) 최초의 황금시대  2) 인간의 타락  3) 타락이후의 도덕적인 퇴보의 기간, 황금시대 - 지상과 천국 양편에 있어서의 신국에의 복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일환적인 역사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Jeremiah의 보편주의(이방인을 포함한 세계적 사회)로 변형되었다가, 다시 미래에 대한 묵시적인 종말론으로 전개되는데  이들 사상에 있어 역사란 어떤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 신께 복귀하는 악몽과 같은 중간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기독교의 사상은 聖어거스틴에 의해 조직화되고 철학적인 형식이 부여된다.

  다)  聖어거스틴의 대세계순환  :  聖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AD)의 유명한 작품 신국(City of God)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묵시사상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유형과 보다 심오한 철학의 관념론적인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聖어거스틴의 역사에 대한 핵심 이념은 여전히 성서의 묵시적인 어떤 것 즉 지상의 에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음이 인간에게 이르렀다는 사실, 구속, 천년왕국, 낙원에 복귀함으로써 끝나는 최후의 심판과 구원받은 자의 불사와 같은 것이다.  개체 인간의 생에 대한 의미와 마찬가지로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우리의 삶이 ‘죽음을 향한 경주’에 불과하다는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회교사상(回敎思想)에 있어서의 대일환론  :   회교(Moslem Religion)와 회교도(Islam)는 유태교와 기독교의 경전을 알라(Allah)의 진정한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모하메드(Mohamed)에 계시된 코란(Koran)은 모든 계시들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이다.  정통 회교도들은 신의 섭리가 모든 역사와 인간과 자연을 지휘하며, 각 사람이 누리는 생은 그를 위하여 알라가 계획한 생이라는 견해를 대체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정의와 자비로운 신에 의한 보상과 응징이라는 사상도 받아들인다.
  모슬렘의 사상에 있어서 대다수 종파는 밀의적(密儀的)인 해석을 내리는 중에 묵시적이며 일환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모슬렘 사상과 정통 기독교의 사상은  일치하고 있다.

  마)  후대 서양사상에 미친 어거스틴의 일환적 역사철학의 영향  :   인간역사에 대한 聖 어거스틴의 철학은 중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력한 것이었다.  그것은 13C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 의하여 재확인 되었으며 바로 그 형식으로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에 이어지고 있다.
  문예부흥기에 이성과 과학이 강조되면서 섭리론의 근거가 위태로워졌으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그것은 더욱 힘차게 재확인 되었으며, 특히 캘빈의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은 더욱 분명하게 중심교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코페르니쿠스와 데카르트 같은 사상가에 의해 발단된 과학적 방법론의 영향으로 역사에 있어서 신의 섭리에 의해 연출된 부분에 대한 회의론이 생겨났다. 그러나 섭리론은 부셰(Bossuet)를 거쳐 다시 20세기 중엽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재확인 되었다.

  바)  콩도르세  :  우주와 인간사에 대한 전통적 종교적인 접근방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경향이 르네상스시대에 시작해서 계몽주의 시대에는 극치에 달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한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천상의 낙원을 지상으로 끌어내렸으며, 그의 시대에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던 새로운 과학적인 지식이 가져다주는 희망을 근거로 하여 이를 확신케 하고 있다.  콩도르세에 의해 확립된 세속적인 진보에 대한 사상은 헤겔의 변증법적 일환역사철학(一環歷史哲學) 아래 마르크스에 의해 공식화 되었다.  

  사)  헤겔  :  헤겔의 변증법적인 순환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명제 - 반명제의 유형을 나타낸다. 순수한 존재로서의 무한의 부정(否定)은 무(無)이다.  현실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무한은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체를 실존적인 세계의 무수한 형식들 속에 현현(顯現)하고 유일한 실재의 개체 즉 절대이념으로서의 그 자체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과정의 목표는 절대적인 무한한 정신의 완전 구체적인 실현으로 이것은 자유의 실현을 의미했다.

  아)  마르크스  :  마르크스는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적인 역사의 발전을 유물론적인 것으로서 보인 역사에 적용했다. 그와 동시에 마르크스는 유태, 기독교의 묵시적인 사상에서 차용한 훌륭한 예언적인 각본을 추가한다.  헤겔이나 동양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역시 자유를 역사에 있어서 인간 행로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물질적인 욕구에 대한 인간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그렇게 될 때에만 인간은 모든 분야에서 자기의 보다 고상한 협동적이며 건설적인 창의력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자)  스리 오로빈도의 일환적인 역사이론  :  20세기 인도의 철학자 스리 오로빈도는 우주적인 역사를 무한한 정신의 퇴화와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오로빈도의 무한자의 개념은 한 존재에 대한 개념이며, 그의 실재는 부분적인 방식으로만 우주에 의해 현현된다.  거기엔 현현되지 아니한 무한한 깊이가 있으며 무한자의 퇴화는 그것의 가장 저급한 수준의 존재, 즉 물질에의 하행(下行)이다. 물질은 非意識的인 수준이라고도 한다. 그런 다음에 진화가 시작되며 비의식적인 것은 下位意識的인것 혹은 생명수준의 존재에 달한다. 다음에 自己의식적 혹은 정신적인 수준, 즉 인간이 차츰 나타난다.  이것을 넘어서서 진화과정의 최종 목표는 영지적(靈知的)인 수준, 즉 초정신적인 것이지만 아직 이러한 수준에 도달해 보지를 못했다.

  차)  라다크리쉬난  :   라다크리쉬난의 일환적인 역사철학도 오로빈도의 역사철학과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다음 그리고 최종적인 기원은 현재의 지성에 대한 층면이, 정신의 층면 즉 자유의 층면에 의하여 대치되었음을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일환적인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자유스런 정신의 왕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수준에 달한 성자들은 몇 안 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유의 높은 층면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정복될 것이며 시간도 극복되고 신국(神國-Brahmaloka)이 지상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벌어질 때 우주적인 현존재는 무한한 존재에 다시 병탄(倂呑)될 것이다. 우주적인 순환이란 만다라의 상징적인 표현에 생생하게 표상된 신으로부터의 소외와 복귀의 순환인 것이다.


    3.  문화순환론(文化循環論)  :  20세기의 제(諸) 견해

  역사를 유형 짓는데 있어서 문화순환사상은 과학적 사회적인 방법으로 사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서양세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대 역사철학자 이븐 칼둔(Ibn Khaldun)과 서양의 비코(Vico, 1668-1744)는 20세기 문화순환사관의 선구자로서, 이들의 사상은 스펭글러, 소로킨, 그리고 토인비와 같은 현대의 순환론자들이 소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상을 내다보고 있다.

  가)  이븐 칼둔  :  그는 몽테스큐와 버클(Buckle) 같은 후대의 서구 사상가들의 ‘실증주의적’인 제 이론 즉 지리학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고도한 문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자기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문명의 근거로서 종교에 중요성을 두었고, 종교는 다양한 집단감성을 가진 다양한 부족들을 단합시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종교의 역할에 의해 한 왕조가 세워지면 그것은 다섯 단계의 변화를 거쳐 결국 붕괴되는 순환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했다.

  나)  지암 바티스타 비코  -  문화순환의 과학  :  비코의 저서 ‘신학문(新學問)’은 표제가 암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과학이라는 명제를 옹호한다.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 비코의 순환적인 유형은 ‘인간적인 시민사(市民史)의 회귀(回歸)’에 대한 ‘영원한 전형적인 유형’이다. 전형적인 영원한 법칙들을 따라 모든 국가사정은 발전, 진보, 성숙단계, 쇠퇴, 멸망을 통하여 진행되며  비록 영원한 시간을 통하여 때때로 탄생하게 되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할 것이며 인간의 문화순환은 아주 똑 같은 유형 속에서 회귀할 것이다.  비코의 위대함은 이븐 칼둔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역사에 대해 그가 인본주의와 사회학과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다)  오스왈드 스펭글러의 문화순환론  :  20세기 문화순환론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역사철학자는 스펭글러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소우주적인 유기체와 비슷한 출생, 성장 및 쇠퇴의 유형을 따르는 독특한 대우주적인 유기체라는 것이다.  개개의 대문화유기체는 하나의 종교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총합된 전형적인 개성 혹은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 문화의 예술과 과학, 그리고 사회적인 기구와 정치적인 기구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몰락과 쇠퇴는 그 문화를 총합시키는 주된 이념에 대해서 회의를 가질 때부터 시작된다. 역사란 그와 같은 대문화 유기체의 발전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  소로킨의 문화역학(文化力學)의 순환적인 유형  :  하버드의 사회학자 소로킨도 문화순환론을 옹호하고 있다. 각 문화는 특유한 이념적, 이상주의적, 감각적인 순환의 과정을 거쳐 나간다. 그러나 그를 뒤따르는 제 문화는 전 문화 위에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대다수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로써 소로킨의 역사에 대한 이론은 나선적(螺旋的)인 것이 되며, 하나의 문화가 중심으로 삼고 발전하기 시작할 지도 모를 핵심적인 사상은 이념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것이다. 이상주의적 또는 완전한 것이란 종교적(직관적-신비적)인 것과 합리적-과학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총합하는 이념이 차츰 그 창조적인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에 그 문화는 쇠퇴하고 와해된다.

  마)  토인비  :  토인비의 대체적인 관점은 인간문명의 기본측면으로서의 종교가 전반적인 진보를 보여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나선적인 것이다.  과거의 모든 위대한 문명이 보여준 흥망성쇠의 유형은, 사람들을 현세의 유물주의적인 궁극 목표로부터 소외시키고 정신적인 궁극 목표로 향하게 하는 신의 섭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토인비는 한 문화의 몰락은 세속적인 의미의 목표에 대한 환멸과 종교의 진행에 있어서 발전을 유발하는 것, 즉 보다 높은 고등종교의 탄생으로 인간은 정신적인 층면의 목표를 향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그와 같은 영원한 정신세계에 있어서 만이 성취되는 것이었다.



    4.  결론  :  순환론에 대한 케언즈의 결론

  이상에서 우주순환론, 일환론, 문화순환론으로 분류된 과거의 여러 사상가들의 견해를 케언즈의 이해를 통해 극히 간단히 살펴보았다.  끝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케언즈가 내린 몇 가지의 중요한 결론을 살펴본다.

  1)  역사를 순환적으로 유형(類型) 짓는 것이 옹호될 수 있는가?

  순환적이거나 비순환적이거나 간에 인간역사의 중요한 몇 가지 측면들이 부합되는 절대적인 유형을 제시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 현대의 역사가와 사료(史料)편찬가들의 견해이다. 실제의 역사적인 인간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 가운데 작용하는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다원론적인 방법을 택하지만, 결국 역사가들이 하나의 사상에 맞추어 사실들을 나열하는 방법은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속으로 구상해야 하는 것이다.  또 역사가의 사상은 그가 처한 환경과 시대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물리, 과학 이외의 제 분야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완전한 진리라고 할 것을 어느 단일한 세대에서도 이루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것이라고 자부하는 어떤 특수한 역사철학을 회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문화와 현재 동, 서양의 제 문화가 시도하는 것을 감식하고, 개방적인 마음을 갖게 하여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동, 서양 순환철학의 비교 (역사의 목표와 의미에 있어서의 유사성)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혹은 중국 도교와 요가체계와 같은 모든 동양의 순환철학에 있어서 목표는 정신적인 자유이다.  이것은 개아(個我)의식에 집착한 욕망의 물질세계-분열과 해체의 세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일자(一者)인 동시에 일체(一切)인 중심과 더불어 정신적인 통일과 총화를 이룬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인류와 다른 우주의 생물들에 대한 그러한 초역사적인 목표는 역사에 대하여 영혼의 해방이라고 하는 목적을 부여 한다.  또한 동양의 정신철학은 편협한 저 세상적인 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자유와 성숙이야말로 분리된 개아(個我)가 정말로 신화라는 것과 인간의 목표는 중심이며 일체이신 무한한 一者와 합일하는 것임을 체득하는데 있음을 강조한다.

  우주와 인간역사에 대한 모슬렘과 기독교의 묵시적인 일환사상의 목표는 여러모로 동양적인 견해와 유사하다. 역사와 우주 그리고 인간은 동양인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짧은 것으로, 절대적인 시원(始原)과 종말을 가진 대일환(大一還) 속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중신의 세계, 즉 신의 정신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생사의 물질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에서는 동양적인 사상의 목표와 거의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일환론적 사상의 본질은 토인비의 문화순환론에 이어졌으며 헤겔에 있어서도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개체 인간의 인격의 목표가 관여하는 한에 있어서 동양의 제 학파의 그것과 거의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증법적인 유물론은 공언하듯이 미학적이며 이 세상에서 생의 본질적인 향락에 집중하였다. 사회의 물질적인 제 생산력은 직접, 간접으로 인간의 문화적 체계를 창조하는 신들이며, 인간의 목표는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유일한 삶에 있어서 이들 제 생산력의 산물을 향수하는 것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목표는 대다수의 대중이 마침내 집단적으로 생산의 수단들을 소유하게 될 때에 달성된다고 보았는데, 이 목표는 인간역사의 묵시적인 대일환 속에서 달성되는 것으로 이 목표의 성취는 전 인류에 대한 자유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단지 인간적인 수준에서 만이라고 한다면 개체 또는 개아의 의식을 상실한 일종의 인간성에 대한 집단적 혹은 공통적인 의식에 있어서 중심에의 복귀를 전제로 한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인 목표와 동서양의 제 철학을 연결하는 근본적인 패반(覇絆)이 존재한다.  노트트롭이 말한 것처럼 인류를 위한 새로운 기원을 수립하기 위하여 우리는 서양의 과학적인 지식과 공학의 이론적인 요소와 더불어 결합된 동양의 강렬한 초의식적인 영성(靈性)을 필요로 한다.

  3)  우주적인 순환들과 현대과학 Premieral

  현재 가장 호의를 많이 얻고 있는 두 가지 우주론적인 이론, 즉 ‘계속적인 창조론’과 ‘폭발설’은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성질의 대우주적인 순환들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폭발설’을 주장하는 학파는 최초의 원자(Premieral Atom -레마르트) 혹은 일렘(Ylem -가모프)의 폭발로부터의 발단을 가정하는데, 이것은 인간역사의 일환적인 묵시론 들과 일치한다.

  또 ‘계속적인 창조론’은 정신에 있어서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헤겔과 스피노자와 같은 서양의 범신론적인 사상가들의 우주론적 사변에 가깝다.  그러나 ‘폭발설’은 일렘이나 최초의 원자가 나타나기 이전의 세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없고, ‘계속적인 창조론’은 수소원자의 無 로부터의 창조라고 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  

  ‘계속적인 창조론’의 최초의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일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하계의 모든 송이, 모든 항성, 모든 원자는 시작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주자체는 그렇지가 않다. 우주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분들 이상의 어떤 것이며, 아마도 결론을 예측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호일레는 무한한 우주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무한을 가정한다.
  서양의 대일환론은 이러한 견해에 일치하지는 않으나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및 중국의 역사철학은 그것과 완전히 조리가 닿는다.  하나의 세계질서에 뒤이은 또 하나의 세계질서는 각기 동일한 근본적인 유형으로서 공허한데서 나타나서 결국 사라진다. 호일레는 거의 꼭 같은 것을 긍정하고 있다. 각 은하계는 꼭 같은 패턴을 통해 전개되며 가없는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오직 전체의 무한한 우주만이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삼라만상과 우주 그리고 인간역사에 대한 그러한 유기적인 견해는 중국사상에 있어선 아주 시적으로 출발하였다. 철학적으로 대우주와 인간의 하나임에 대한 신비적인 도교의 직관적인 깨달음에 근거한 중국의 순환관은 우주의 본성과 그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통찰에 달하였다.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은 광대한 우주에 있어서 생명의 발전에 적합한 거대한 유성들이 적어도 1억 개 존재하며, 틀림없이 단세포 형식들로부터 정신의 형식들(그 너머에는 무엇이 가로 놓여 있든지)에 이르는 생명의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극히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순환적인 역사철학들은 우주역사에 적용되었던지 아니면 인간역사에 적용되었던지 간에 뚜렷한 근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순환관들은 현상적인 우주의 궁극적인 본성에 관한 진실한 이념을 직관을 통하여 적중시킨 것 같다.

  4)  예지(叡智)  :  역사에 있어서 이 다음의 기원

  만약 우리가 탐구하였던 과학과 종교철학적인 체계 모두에 의해서 옹호된 인류의 혈연적인 통일의 사상이 결국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인류역사의 다음 기원은 상호작용 하는 두 층면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이며 이 세상적인 하나의 층면은 지상에서 이러한 삶을 누림에 있어 일체의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마르크스, 소로킨, 라다크리쉬난, 토인비, 오로빈도와 같은 사람들이 믿는 바와 같이, 보다 신적인 존재를 창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제외한 이들 사상가들은 사람들이 이러한 물질세계를 넘어서서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와 ‘본향’으로서의 정신적인 층면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인간의 통일은 영속적인 근거 위에서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극적이며 깊은 영감적(靈感的)인 견해는 지학자(地學者)이며 인류학자인 떼일야르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에 의해서 그의 저서 ‘인간의 현상’(The Phenomenon of Man)에서 제시된다.  보다 큰 구심성(centralism)이 언제나 본질적인 측면이었던 복잡화를 향하여 , 생명이 지향적인 추세를 보여준 이래 인간의 더 이상의 진화는 하나의 보다 큰 구심성(求心性)을 보여줄 것이라고 샤르댕은 주장한다. 사람은 이미 생명층 혹은 생명권을 넘어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둘레에 하나의 새로운 층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신권 또는 정신사회의 층이며, 그것이 밖으로는 지구라는 행성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으며, 안으로 정신권은 우리의 전체 정신적인 문화의 유산 또는 정신적인 분위기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검토한 모든 역사철학들은 사랑을 건설적이며 응집력이 있는 패반(覇絆)으로서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제 사회는 성장하고 번영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논의한 동,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샤르댕은 ‘이성과 신비주의의 접속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은, 그것의 발전에 대한 바로 그 본질(사랑)에 의하여 그 활력의 최대치를 힘자라는데 까지 투시하여 찾아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 한다.  이것들은 이성, 과학 그리고 사랑, 즉 민주적이지만 유기적인 세계문화가 나타날 것이며, 그런 다음에 최종적으로 영원한 오메가의 상태가 이르게 될 것을 의미한다.

  라다크리쉬난은 높은 영성(靈性)의 새로운 기원 즉 정신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있어서 지배적인 요소였던 지성을 대신하게 될 새로운 기원의 여명(黎明)을 기대한다.  다가오는 정신의 시대는 지적인 사랑에 근거한 전 세계적인 인간통일의 기원이 될 것이며, 대체로 협조하는 개인들과 민족문화들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지성(知性)과 사랑은 지배적인 것이 될 가치들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이들 제 가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최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역사의 다음의 기원은 오웰(Orwell)의 1983년의 비극적인 광경을 닮게 될 것이다.  보다 심하게 말하면 3차대전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끔찍스럽게 다시 야만 상태로 환원될 것이다. 이것은 비코의 말을 빌리면 너무 썩어서 구제할 길이 없는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치유책’인 것이다. 이성과 사랑 그리고 이들 제 가치를 보충하기 위한 작업은 인류를 이 마지막 재앙으로부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천문학적인 광대함에 있어서 최고의 정신적인 목표는 이미 많은 은하계에서 달성되어 왔을 것이다.

  동양의 행자(行者)들과 서양의 행자들의 신비적인 체험에서 이루어지고 윤곽이 잡힌 정신의 완전한 순환은 호일레의 제 이론이 옳다고 할 경우 무수한 은하계에서 이미 달성되어 왔을 것이며 또 그와 같이 반복될 것이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의 동양적인 순환관은 이런 까닭으로 하여 대우주적인 수준에서 역사적인 진리를 직관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다음의 대문화의 순환은 분명히 세계적인 문화의 기원이며, 이전 어느 때 보다도 훨씬 고상한 정신적인 수준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성자들과 현인들이 있다. 이 거룩한 전위대는 우리에게 참 자유에의 길을 보여 주었으며, 우리는 참 자유를 인간역사의 직접적인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Ⅲ  현대문명의 위기(危機)        


    1.  위기의 몇 가지 요인

  오늘날 현대문명의 미래에 대해 매우 심각한 위기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현대 인류의 위기라는 의식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은 여러 각도에서 그것을 분석하고 있으나 그 결론은 대략 몇 가지의 문제로 귀결지어 진다. 즉 그것은 전쟁의 문제, 인구의 문제,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식량의 공급문제 및 현대사회의 사상적 갈등과 가치관 혼란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의 발생은 인류가 근대에 들어와 급격한 과학적, 공학 기술적 혁명을 이룩한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자연 지배력을 급격히 확대시키고 인간의 많은 불행과 재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러한 기술적 혁신은 오늘날에 있어서 오히려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된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전 인류의 절멸이라는 위험을 가졌던 시기는 아직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시대는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막대한 과학적, 사회적, 생물학적 지식이라는 자원을  획득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지식의 무절제한 사용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문화의 파멸이라는 위험을 눈앞에 맞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다 바람직한 인류의 미래, 번영과 행복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이상적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난제의 성격을 밝히어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된다.

  1)  전쟁의 문제  :  인류역사상 전쟁은 사회변화의 중요한 한 원인으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러셀의 견해에 의하면 과거의 전쟁은 하나의 수지맞는 기업이었고, 전쟁에서의 승리는 많은 물질적 부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의 성과는 이미 그러한 원칙을 과거의 한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의 발달된 핵무기와 미사일 체제는 전 인류의 순간적인 파멸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그러한 순간의 현실화를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전쟁의 위협은 현대인류가 극복해야할 중대한 난제의 하나가 되고 있다.

  2)  인구의 문제  :  인구의 문제는 식량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지구상의 면적과 경작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인구가 증가하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생활공간이 축소되고 식량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는 데에서 발생한다.
  역대의 인구증가 추세를 Julian Sorrel Huxley의 통계를 통해 살펴보면,  B. C. 8000년경에  지구상의 인간은 약 일 천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B. C. 5000년경에는 약 2천만 B. C. 400년경에는 2억, A. D. 1650년경에 5억 4천만, A. D. 1950년에는 22억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Rome's Club의 보고에 의하면 1970년에 세계의 인구는 36억으로 추정되고 성장률은 연간 2.1%였다. 이 성장률에서의 배증 기간은 33년으로 이러한 증가율이 변화되지 않으면 2000년에는 70억을 돌파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심각하다. 지구의 식량생산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인구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면 그만큼 식량의 공급은 부족하게 될 것이며, 현재에 있어서도 이미 세계의 여러 곳 특히 저개발국 인구의 상당수가 영양부족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인구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식량의 문제  :  식량의 생산은 인류문화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농경의 시작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존재가 인류문명 발전의 전제조건이라 평가하고 있다. 인류의 인구는 인간의 자연 지배력에 비례하여 증가하여 왔는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급격한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달은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초래하고, 그만큼 식량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로마클럽의 조사에 따르면 개발도상국 중의 여러 나라에서는 절대적 칼로리 섭취량 특히 단백질 섭취가 필요량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더욱이 세계의 농업 총생산은 증가하고 있으면서도 비공업국의 일인당 농업생산은 현재의 불충분한 수준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고 하며, 또 식량생산의 기본적 자원인 토지에 있어서 지구상의 잠재적 농업적지는 약 32억 헥타르로 평가되는데 현재 그것의 반에 해당하는 가장 기름지고 이용이 용이한 토지가 경작되고 있고, 나머지 반을 개발하는 데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므로 새로운 농경지를 개척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F. A. O.(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식량의 자급자족 문제도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위기의 하나가 되고 있다.

  4)  자연의 고갈과 오염문제  :  “현대는 인구의 막대한 증가 및 지질적 자본의 급속한 고갈이라는 희생을 치르고 인간이 지구의 어떤 부분에 고수준의 사회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는 참으로 짧은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으며, 또 1000년 후-인류사로 보아도 짧은 기간-에 우리들의 자손은 모든 광석 , 석탄, 석유가 무참하게 제거된 고갈되고 황폐한 지구에 살게 될 것이다.”라고 K. E. 보울딩은 말했다.

이것은 ‘공업이란 비 환원적 작용에 의존한 것이기에 근대공업은 일종의 지구자원에 대한 약탈’이라고 말한 러셀의 견해와 통하는 것으로, 이러한 지구의 천연자원의 기하급수적 소모와 그 결과로서 빚어지는 자연환경의 파멸적 오염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또 하나의 치명적인 위협이다.  자원의 고갈 문제에 있어서는 오늘날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어느 정도의 희망을 보여주기도 하나,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니다.  한편 오염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당하게 되자 진지하게 그것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으나 그러한 노력은 단지 오염의 진행속도를 늦추는 것에 불과하지 근본적인 해경이 되지 못하며, 인간을 품어온 자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류가 당면한 하나의 비극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천연자원 고갈의 문제와 적극적인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더욱 더 심각한 오염의 문제는 참으로 난제 중의 난제라 할 것이다.

  5)  사상적 대립과 새로운 세계관의 문제  :   오늘날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끊임없는 투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요인은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서로 다른 종교 간의 갈등, 인종적인 증오심, 편협한 민족주의 등이다.
다윈은 그의 저서 ‘종(種)의 기원(起源)’을 통하여 유기적 생물의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생존 경쟁적 세계관은 전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 온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라는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은 아직까지 인간의 잠재적 본능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러셀은 그러한 의식이 ‘그것으로 이득을 볼 수 있었던 황금시대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아직 많은 사람들은 ‘남이 가난해지면 자기가 부유하게 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쟁의식, 타민족, 인종, 사상, 종교에 대한 적개심은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과거에 있어서 그러한 적개심, 증오심은 단지, 부족, 사회, 국가간의 투쟁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은 전쟁에 있어서 어느 일방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념체계에 대한 인간의 광신적 편협성은 전 인류문화의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더욱이 전통적 가치질서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더욱 더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공포로 몰아 그들의 행동을 난폭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정신적-사상적 난제를 인류생존에 관계되는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새로운 가치체계, 세계관 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2.  로마 클럽의 견해에 대한 고찰  

  로마 클럽은 이상에서 고찰한 여러 인류 위기의 원인들을 포함한 인류사회의 위기에 대한 제 요인과 그 상호작용에 대한 집단적 연구를 통하여 10가지의 결론적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아래에 그것을 기술한다.

  1)  세계 환경의 양적 한계와 과도성장에 의한 비극적 결말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 나아가서는 현재 사회의 전체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만한 새로운 형태의 사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불가결의 것임을 확신한다.

  2)  세계의 인구 압력은 현재 이미 우려할만한 상태에 이르러 있으며, 더구나 그 분포는 지극히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류는 지구상에서 균형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게 된다.

  3)  많은 이른바 발전도상국이 절대적으로나 또는 경제적인 선진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향상되는 경우에만 세계의 균형이 실현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인식한다. 또 그와 같은 향상은 전 세계적인 전략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한다.

  4)  그렇지만 세계적인 개발 문제는 다른 세계적인 개발 문제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므로, 특히 인간과 그 환경의 문제를 포함하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반적인 전략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5)  복잡한 세계의 문제는 많은 정량화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들은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보고에서 사용된 뛰어난 정량적인 접근 방법은 문제의 작용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빼 놓을 수 없는 도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식에 의해 문제의 제 요소를 파악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6)  우리들은 현재 불균형 상태에 있고 또 위험한 방향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세계의 상황을 급속히 또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것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기본적인 과제라고 일치하여 확신하고 있다.

  7)  이 노력은 우리들의 세대에 대한 도전이며 다음세대에 넘겨 줄 수는 없다. 이 노력은 결단코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또 중요한 방향전환이 이제부터 10년 동안에 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8)  인류가 만약 새로운 진로를 향해 내딛는다면 전례가 없을 정도의 규모와 범위에 일치한 국제적인 행동과 공동의 장기계획이 필요해질 것이다.

  9)  우리들은 세계의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의 악순환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 발전의 현재 상황을 동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굳게 지지한다.

  10)  마지막으로 우연 또는 파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획적인 방법에 의해 합리적이며 영속적인 균형상태에 달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시행은 결국 개인, 국가, 세계의 각 레벨에서의 가치관과 목표의 근본적인 변경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Ⅳ  결론  :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방안
  

  지금까지 본고(本稿)에서는 역사철학의 본질과 그 목적에 대한 검토, 과거의 여러 가지 순환론적 역사철학에 대한 간단한 고찰, 그리고 역사철학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되어야 할 현대문명의 위기의 제 요인 몇 가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러면 이제 우리 인류사회의 보다 나은 이상적 사회로의 전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원칙적 기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타(他) 사상, 종교, 신념체계에 대한 관용(寬容)  

  사유하는 존재, 생물학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역사시대를 통하여 가지각색의 종교, 철학 등, 세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체계를 소유하여 왔다.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들의 인식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자연, 사회적 실재들에 대하여 항상 종합적인 이해에 이르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자연적, 사회, 역사적 환경에서 생활하였던 인간들이 매우 다채로운 사상체계를 확립했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인식체계는 인간 정신의 창조적 행위의 결과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서로 상이(相異)한 자연환경과 사회,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생활한 많은 인간들이 그들의 특유한 직관적 인식과 이성적 사유의 활동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세계관을 획득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통하여 판단하면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체계와 이질적(異質的)인 다른 모든 세계관에 적대(敵對)한다는 것은 무지와 편견의 결과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분노와 증오심으로 어둡게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폐쇄적(閉鎖的) 집념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간의 투쟁, 그리고 광신적 민족주의 등이다. 자신의 가치체계에 대한 폐쇄적 확신은 끊임없는 개인과 개인, 사회 대(對) 사회. 국가와 국가 간의 투쟁을 야기하고 있다.  러셀은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논하면서 ‘현대의 소란은 광신적인 경향이 증가하고 있는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폐쇄적 집념이 맹목적인 편견이며, 모든 가치체계는 인간정신의 창조적 활동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모두 그것대로의 특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 타 사상, 종교, 철학체계에 대하여 관용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오늘날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2.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적대 감정에서의 탈피 : 세계주의로의 지향

  가치체계에 대한 폐쇄적 광신과 더불어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것으로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적대감정이 있다.  개인을 단위로 이룩되는 인간의 사회는 역사시대를 통하여 사회적 집단의 규모를 계속 확대시켜 왔다. 그것의 원인은 인간의 자연 지배력의 확대와 의시 영역의 확대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은 그들의 시간적 공간적 생활영역을 확대시켜 왔던 것이다. 그것은 가족에서 씨족으로, 씨족에서 부족으로, 다시 부족에서 민족, 국가로 사회 단위가 증대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인종 간에,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국가집단 간의 대경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서로 이질적인 문명사회 간의 갈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인간 대 인간의 투쟁을 야기하는 원인 중에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생존본능’과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이 있다.  생존본능은 자연, 사회적인 외적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자연적 위협은 인간생존의 기본요소인 의식주의 결핍에서 야기된다.  사회적 위협은 인간역사의 한 원리로 적용되어 온 약육강식의 원칙에 의해 야기되는데, 이러한 생존 경쟁적 의식구조는 이질적인 사회, 국가, 문화집단에 대한 공포감과 증오심 형성에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류는 과거의 생존 경쟁적 의식구조를 극복하고 전 인류를 한 가족으로서, 단일한 세계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 있어서는 원시적인 인간의 기술로 인하여 他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시대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세계는 이미 그러한 단계는 넘어 섰다.

  1)  현대의 고도화된 과학기술은 그것을 인간이 유효하게 활용하고, 인구의 증가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모든 인류를 물질적 결핍에서 구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2)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전쟁 무기로 인해 전 인류의 생존이 위태롭게 됐다는 사실.
  3)  인종, 민족, 국가 간의 적대감정은 오랜 인류역사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개조될 수 있다는 세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과거의 생존 경쟁적 의식을 과감히 극복하고, 세계 인류를 한 형제로서 의식하고, 사랑으로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그러한 세계적 결단을 통해서만 인류의 문화 - 현대문명은 생존할 수 있고, 번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계에 대한 동양의 우주순환론적 이해 : 직관에 의한 자연, 우주와 인간의 合一
      
  과거의 많은 성자, 현인들이 우주의 본질과 인간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들은 직관적 인식을 통하여 여러 가지의 세계(우주)관을 확립하였는데, 그러한 것들은 본질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몇 가지의 형태로 분류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케언즈는 그의 저서 ‘Philosophies of History'를 통하여 순환론적 역사인식 패턴을 적용하여, 여러 가지의 역사철학적 인식유형을  우주순환론, 일환론, 문화순환론의 세 형태로 구분하였다.

  人類史上 모든 문명권은 위와 같이 그들의 특유한 세계관 아래 인간과 자연을 인식하여 왔다. 그리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여러 세계관이 세계전역에 소개되었고,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비교, 분류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들은 결국 어떤 것이든 하나의 세계관을 선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어떤 형태의 세계관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모든 인간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결론이지만, 무한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그들의 존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무한한 미래에 있어서 그들이 지향해야할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하나의 세계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관은 전 인류가 공동의 관심 하에 추구해야 할 것이며,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화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개아(個我)의식에 집착한 욕망의 물질세계- 분열과 해체의 세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一者인 동시에 일체인 중심과 더불어 정신적인 통일과 총화를 이룬 세계로 들어가는 것, 즉 정신적인 자유를 목표로 하는 “동양의 우주순환론적 사상에 기대를 갖는다.”  또한  ’계속적인 창조설‘을 제시한 호일레를 중심으로 한 현대과학적인 우주관에 대하여  “서양의 대일환론은 그러한 견해에 일치하지 않으나,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및 중국의 역사철학은 그것과 완전히 조리가 맞는다.”고 평한 케언즈의 견해에 나는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더 나아가 동양적인 세계관이 미래의 인류사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과거의 대부분의 역사철학에 공통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자유의 추구와 사랑을 기초로 한 인간전체의 화합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원칙 하에,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서 구하고, 끊임없는 창조 속에 인류의 무한한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4.  진리(眞理)에 대한 성실성(誠實性)  

  끝으로 나는 현대문명의 자멸이라는 지대한 과제를 맞고 있는 현대의 인간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앞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체계와 같지 아니한 세계관에 적대(敵對)하는 것은 무지와 편견의 결과라고 말하였고,  또 인종적, 민족-국가적 투쟁과 서로 다른 문명사회 간의 갈등은 인류의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개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와 같은 견해를 밝힌 것은,  첫째, 인간의 사상, 품성은 자연적, 사회적 환경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과  둘째로 인간은 아직 정신적으로 유아기에 있는 존재로서 앞으로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또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될 존재라는 생각.  셋째, 사물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편견에 그칠 위험이 있으며, 생동하는 창조적 사유의 흐름을 차단하는 위험이 따르기 쉽다는 것, 등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K. E. 보울딩은  그의 저서 ‘The Meaning of Twentieth Century’에서 새로운 문명 후 사회로의 전환에 대해 논하면서
  “당신은 어느 쪽인가? 라는 질문은 위험한 질문이다. 그러한 질문은 대화보다는 변증법에, 교육보다는 설교에, 자기음미보다는 자기변호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낡은 편견을 굳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보울딩의 견해는 현대의 여러 위기를 극복해야할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데 매우 뜻있는 견해라 생각되며, 아울러 니체의 다음과 같은 논의는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위대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회의적이다. 모든 확신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가 그 강한 의지에 깃들어 있다. 신념을 원한다는 것, 긍정이건 부정이건 어쨌든 절대적인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약한 증거이다…. 신념이 강한 자는 조그마한 족속이다. ‘정신의 자유’ 즉 본능적인 불신은 위대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에 대한 성실성’  ‘티 없이 맑고 밝은 마음가짐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관찰하려는 태도’  ‘더욱 더 바른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수치심을 갖지 않고, 긍정하려는 깨끗한 용기’  그러한 것이 새로운 인류사회의 창조를 지향하는 현대의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성실성과 용기, 자연과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 무한한 우주(자연)와 합일하려는 의지 등을 가지고, 끊임없는 창조적 노력을 계속할 때에, 모든 인류의 난제는 극복될 것이고 무한히 밝은 미래가 전개되리라 믿어진다.  [ 1978.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