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귀한 회억

작자: 장춘 대법제자 일심(一心)


【정견망 2010년 5월 9일】

1. 99년 ‘7.20’ 전 장춘에서 대법이 널리 전해지다

나는 1998년 법을 얻은 제자로 당시 15살이었다. 당시 막 법을 얻은 후 어머니를 따라 장춘에 있는 작은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다. 법공부 하는 사람이 많아서 매일 약 20-30명이었고 가장 많을 때는 100여 명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6-8시까지 두 시간 동안 법을 공부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을 통독한 후 교류했다.

새벽에는 단체 연공을 했다. 보도원이 매일 새벽 녹음기를 들고 왔고 먼저 도착한 수련생들이 연공장소를 깨끗이 쓸었으며 시간이 되면 5가지 공법을 연마했다. 어떤 노수련생은 전적으로 신수련생의 동작을 고쳐주었다. 그때 단체 법공부에 참가한 동수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으며 우리 팀에서 어린이 제자는 4명이었다. 가장 어린 수련생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고 중등 전문학교에 다니는 언니도 매우 정진했다.


나중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나는 법학습 팀을 바꿔 장춘의 한 중학교 부근으로 나갔다. 토, 일요일 휴식 때 사람들은 중학교 옆 길가에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 연공과 홍법을 했다.


당시 장춘의 각 구(區)에서는 모두 대형 심득 교류회를 열었다. 98년에 엄마도 체험을 썼으며 법공부를 책임진 한 동수가 교정을 도와주었고 총보도소에 제출했다. 보도소 책임자는 우수 원고로 선발해 발언하게 했다.


98년 장춘 세무 전문학교에서 개최한 파룬따파 심득 교류회에는 나도 참가했는데 당시 참가한 사람이 약 1-2천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당시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사람이 12명이었는데 그중에는 6살 난 어린제자, 연세가 많은 동수, 간부도 있고 학생도 있었다. 각계각층의 동수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수련 후 심성을 승화한 체험을 이야기해 유력하게 대법을 실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99년 새해 장춘 총보도소에서는 지질궁 광장(지금의 문화광장)에서 만인 아침 연공을 조직해 대법을 널리 알렸다. 당시 중국 북방의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사람들은 가지런히 서서 광장을 가득 메웠다. 심지어 광장 남측에 있는 해방대로 동서 양측의 길에도 동수들로 가득 찼다. 당시 어떤 사람이 전문적으로 이번 홍법을 촬영했으며 많은 진귀한 역사자료를 찍었다.


내 기억으로는 장춘 텔레비전 기자가 와서 취재했고 파룬따파가 장춘에서 널리 전해져 성황을 이룬 것을 보도했다. 어떤 동수는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자신이 수련 후 심성을 제고한 체험을 말했다. 동수들의 표현은 매우 안정되었고 상화 평화롭고 선량했다. 세상과 다투지 않는 수련자의 풍모를 취재하는 여기자도 매우 부러워하고 탄복했다. 당시 취재에는 군인, 원로 교수, 박사과정 학생 등 법에서 이익을 본 많은 동수들이 있었다.


당시 장춘에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 장춘의 온 거리에 대법제자들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법공부에 매우 정진했고 홍법활동도 많았다. 매번 나가서 홍법을 했는데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로 연공하며 인연 있는 사람이 보면 즉시 들어와 법을 얻었다. 지금도 당시 단체 법공부하며 홍법하던 날들이 그립다. 그 잊지 못할 날들에 대법은 내 생명 깊이 뿌리 박혔으며 이후 힘겨운 세월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내 생명의 진귀한 회억이다.


2. 99년 7.20 장춘 상방

1999년 4.25 이후 날로 점점 긴장되어 갔다. 99년 7월 21일 오전 우리는 정부가 파룬궁에 대한 부실한 보도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성위원회를 찾아가 정부 측에 정황을 설명하려 했다. 몇몇 동수들이 차를 타고 함께 위원회에 갔다. 그곳에 가보니 많은 대법제자들이 남녀노소 참가해 인민대가(人民大街) 양쪽 길이 전부 가득찼다.


우리 몇 명이 위원회 좌측 길에 서서 동수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몇몇 제자들이 들어가서 정부 지도자에게 정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들의 생각은 매우 간단했다. 그저 정부를 향해 파룬궁에 대한 잘못된 보도만 깨끗이 하고 우리의 법공부 환경이 느슨해지게 하면 그만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파룬궁에 대해 강택민이 독단적으로 꾸민 잔혹한 탄압 음모는 이미 조용하 실시되고 있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중에 많은 차량이 길옆에 정차한 것을 본 많은 사복경찰들이 대법제자들을 난폭하게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많은 동수들이 경찰차로 끌려갔다.


성위원회 양측에 있던 대법제자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 차에 실려 멀리 끌려갔다. 나와 많은 동수들은 장춘에서 50리(기억이 확실치 않음) 정도 떨어진 경찰학교로 끌려갔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대법제자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마당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수백 명이나 되었다. 차량마다 대법제자들이 하차한 후 스스로 줄지어 앉았다.


7월 장춘의 뙤약볕은 불처럼 뜨거워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다. 동수들은 땅에 앉아 누구도 떠들거나 왁자지껄하지 않았으며 비록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모두들 평화롭고 탄연하게 단체로 <전법륜>을 외웠다.


어떤 제자는 이곳에서 우리를 단속하는 책임자에게 정황을 설명하러 찾아갔는데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정부에서는 실탄을 장전한 무장경찰을 보내 마당 입구에서 우리를 지켰고 문밖에는 사복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떤 제자는 매우 일찍 와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저녁에 어떤 동수가 돈을 내어 부근의 식품점에 가서 물과 빵을 사왔지만 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떤 동수는 굶으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음식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우리는 그곳에 한참동안 갇혀 있었다. 약 밤 10시쯤 되자 동수들은 여기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다고 느껴서 사람들은 길을 잘 아는 제자의 인도 하에 어둠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장춘 시내로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은 대낮에 뜨거운 태양아래 하루 종일 앉아 있었기에 많은 동수들은 물이나 밥을 먹지 못했으니 상식대로라면 우리들은 매우 피곤해야 했으며 근본적으로 걸어서 갈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지난 후 사람들의 기억에 그날 밤 동수들은 매우 정신이 좋았으며 신체도 매우 가볍고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으며 밤바람이 서서히 불어오자 매우 편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어 두 시간여 만에 장춘으로 돌아왔다. 성위원회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 중이었다. 같이 간 몇몇 동수들이 상의해 먼저 어느 동수의 집에 가서 휴식하고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다음날은 바로 7월 22일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우리는 위원회에 도착했는데 나와 같이 온 동수는 두 어린제자는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 온 후 밤중에 달려온 외지 동수를 보았다. 우리는 부근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7월 22일 대낮에 위원회 주위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외지에서 온 동수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우 질서 있게 도로 양측의 보도에 서 있었으며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의 교통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 무장경찰이 성위원회 앞의 찻길에 경계선을 그었으며 그날은 경찰도 전날보다 훨씬 많았다.


사복경찰이 큰길에서 무전기를 들고 지휘하며 분위기가 단번에 긴장되었다. 대개 오전 8,9시 경 경찰은 또 어제처럼 대법제자를 끌고 차에 태우려 했다. 어떤 동수들은 어제의 경험이 있으므로 누구도 차에 오르려 하지 않았고 손을 잡아당겼다. 경찰은 동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잡아당기기도 했고 차고 때리고 하나씩 강제로 차에 태웠다.


차에 끌려간 동수들 중 어떤 사람은 차문을 열고 뛰어 내렸고 어떤 사람은 차문을 붙잡고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경찰 서너 명이 강제로 제자들을 차에 태웠다. 경찰의 폭력에 대해 동수들은 맞아도 저항하지 않았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앞에 있던 동수들은 뒤에 있는 동수를 보호했으며 사람들은 손과 어깨를 잡고 층층 인의 장막을 형성해 큰소리로 경찰의 야만적인 폭행을 제지했다.


나중에 경찰이 차에 강제로 태운 제자들을 끌고 갔다. 동수들은 급한 상황에 경찰의 경계선을 넘었고 길위에서 인산(人山)을 이뤄 차 앞을 가로막았다. 당시 장면은 아주 장관이었으며 경찰조차도 진감했다.


나중 동수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쫓겨 차에 올랐다. 이번에 우리는 남령(南嶺)체육관으로 보내졌다. 차에서 내려 보니 체육관(장춘에서 가장 큰 체육관이다)안에는 사람이 가득 찼는데 얼마나 많은 제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수들은 여전히 어제처럼 조금도 떠들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전날 나와 함께 있었던 동수를 많이 보았다. 아마 정오쯤 되어 대학생 같은 청년 남자동수가 빙그레 웃으며 걸어가면서 말했다.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세요?” 우리는 갑자기 머리를 들었고 많은 동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사부님!” 그날 7월 22일 많은 남령체육관의 동수들은 장춘의 푸른 만리 창공에 사부님의 법신이 하늘에 계신 것을 보았다. 한동안 사람들은 감정이 고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후 나와 함께 간 어린제자 하나는 당시 사부님의 법신이 연꽃에 앉아 아래에 있던 제자들을 보고 계셨다고 했다. 오후가 되자 우리는 경찰에 이끌려 인민광장 부근의 초등학교로 갔다. 한 교실 안에서 지도자처럼 보이는 중년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건성으로 우리를 진정시키고 간단히 몇 개 문제를 물어보고 동수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총총히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은 운동장에 앉았는데 이때 하늘에서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온유하고 편안했다. 천목이 열린 동수는 나중에 말하기를 그날 천상의 뭇신들이 대법제자의 참된 호법을 위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7.20 이후 대륙의 풍운이 돌변하여 중공은 대법제자에 대해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다. 대법서적은 불태워지고 파룬궁은 불법으로 단속되었으며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불법으로 투옥당하고 혹형으로 시달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박해치사 당하고 심지어 산채 장기를 적출당했다. 그러나 이 일체의 잔혹한 박해에 대법제자의 견정한 신념을 가로막지 못했고 더욱이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지금 파룬궁은 전세계 140여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졌고 대법제자들은 오대양 육대주에 퍼져있으며 파룬궁 창시인은 각국의 표창장을 받았다. 이 한 차례 바른 믿음에 대한 후안무치한 박해도 머지않아 곧 끝날 것이다. 역사는 이 한 페이지를 지나왔고 세인들은 대법의 위대함을 볼 것이며 영원히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위대한 시각을 기억할 것이다.


발표시간:2010년 5월 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5/9/660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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