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aldiwkzl703/1428


진화에 대하여


서론


신지학에서 가르치는 진화란 서구 사회의 정교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다윈의 연구에서 나온 다양한 이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결과들과 서구 종교의 입장을 인정하는 위치라 할 수 있다. 즉 이 거대한 진화란 “위로부터의 도움” 없이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해석과 설명에서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무에서의 창조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또한 세익스피어 같은 정신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진화했다는 것도 단호하게 부정한다.
 
생명과 인간은 결코 시작도 없고 혹은 어떤 위대한 존재의 행위로 어디선가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며 우연히 진흙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이전의 가정을 진전시켜야 한다. 여기에 정신 혹은 최고의 생각의 집합체인 우주심(Universal mind)은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존재의 뿌리에 있다는 것과 이것이 인간과 대자연 속에 현현하는 지성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라는 것을 더 추가해야 한다. 이것을 넘어서 우연이나 기적이 없으며 법칙으로 이루어진 우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생명은 윤회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현현한다.
 
이상하면서 놀라운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과 모든 생명의 진화의 근간을 이루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존재들은 위해서 이미 앞서 간 존재들의 자발적인 희생 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진보는 아무 도움이 없는 바닥에서 솟아나올 수 없다. 마치 식물이 태양의 빛과 따뜻함에 이끌리듯이, 진보란 위로 이끌리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 4장에서 많아 다루었다.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진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으로부터 오며, 이전에 존재했던 그것 속에는 진화하는 씨앗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성은 지성에서 와야 한다. 우리가 실수들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무지에서 올 수 없다. 무지는 유일한 탈출구로써 지식의 탐구를 제시하는 조건을 종종 만든다. 그러나 만약 무지가 지식의 씨앗이라면 우리들 모두는 매우 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꽃이 봉오리에서 펼쳐지듯이, 나무가 씨앗 속에 있는 계획으로부터 펼쳐지듯이, 진화란 내면으로부터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진화는 모나드 속에 있는, 상위 자아(Higher Self) 속에 있는, 그리고 우주심(Universal Mind) 속에 있는 잠재된 지성, 우리들 속에 씨앗 형태로 갇혀 있는 지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성장은 본질적으로 지성의 표현과 범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의 발전은 내적인 성장의 부산물로 항상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진화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진화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말한다. 신지학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의식은 항상 존재한다. [씨크릿 독트린] 15p.에서 말하길, “유일의 실재, 절대자(the Absolute)인 파라브라흠(Parabrahm)은 절대 의식의 장이다. 즉, 제한된 존재들과 모든 관계가 없는 그 본질로 의식을 가진 존재가 그 상징이다.” 진화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고, 의식의 범위로 진화하는 지각의 넓이와 폭이다. 진화하는 것은 보편적 형제애라는 사실, 대아의 보편성과 진리를 개개인이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다른 진화는 이 발전에 달려있다.
 
우리가 삶의 교훈을 배움에 따라서 표면 밑에 있는 것을 보기 시작하고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단일성을 보여주는 관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커져갈수록 우리가 환생해서 들어가는 도구들이 점점 더 섬세해질 것이다. 형태들은 그 자체로 진화하지 못한다. 마치 집이 스스로 커갈 수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형태들도 자기 표현을 위해서 도구들을 만드는 지성들의 결과이다. 건축가가 지성적이면 지성적일수록, 그 집은 더욱 더 조화롭고 유용하게 된다. 진화하는 지성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태들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집이 다른 집으로 진화할 수 없듯이, 한 가지 형태가 다른 형태로 진화할 수 없다. 형태를 사용하는 존재는 자신의 필요에 맞는 다른 형태를 개발하고 오래된 형태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남겨준다. 마치 오래된 집을 그 집에 맞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듯이.




 
진화 뒤에 있는 힘은 무엇인가


진화의 힘은 “유일한 생명”인 모나드(Monad) 속에 있다. 그 힘이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은 지성적인 존재에게 달려 있으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에게 대부분 달려있다. [씨크릿 독트린 1권] 274p. 에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는 내면에서 밖으로 작용하고 안내된다.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리고 대우주의 작은 복사본이자 소우주인 인간은 이런 우주 법칙과 그 법칙의 활동 및 방식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이다. 전체 대우주는 의식을 가진 존재들—각자 나름 대로 수행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의 무한한 하이어라키에 의해서 안내되고 통제되고 활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존재들을 어떻게 부르던 혹은 그런 존재들을 디얀-쵸한(Dhyan-Chohan)이라고 부르건 천사들이라고 부르건, 모두가 카르마의 법칙과 우주 법칙들의 대리인들이라는 의미에서 “메신져들”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들 각각은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에 인간이었거나 다가오는 미래에(만반타라) 인간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만약 처음의 안내를 따른다면 아마도 우리를 위해서 자동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큰 가치가 없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씨크릿 독트린]의 세 번째 명제에서 말하길: “ 비전철학의 중추적인 가르침에서는 인간에게 어떤 특권이나 특별한 선물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오랜 기간 동안의 변형과 환생 동안 내내 스스로의 노력과 과실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Ego)가 얻어낸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든 진화는 카르마에 의해서 제약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유도하고 만들어낸 노력들”의 산물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주의 유일한 “선택자”인 인간은 카르마의 영향을 만들고 느끼는 자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진화 과정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개별 단위 속에, 인간 개개인 속에 배울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 이 힘은 변하지 않고 아무리 많이 사용하더라도 줄어들지 않는다. 존재들은 생명의 단위들로 자신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힘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성장하거나 진화한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어떤 것을 배운다. 그는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배움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힘은 사용하더라도 변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여전히 이용가능하고 그렇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증대시켜 왔다. 그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기 위해서 지성을 한층 더 완전하게 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자신 속에 있는 그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변화를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경험과 지식을 쌓게 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가 가능한 것에 토대가 항상 된다.




진화는 언제 시작했고 왜 진화과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진화는 생명이 그렇듯이 시작도 끝도 없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가 말하길:

인간이 이 지구에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의 궁극적인 기원 혹은 시작은 찾을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이 지구 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다른 구체(지구 같은 별)에서 언제나 존재했으며, 대우주의 어딘가에서 항상 존재할 것이다. 천상의 인간(Heavenly Man)의 이미지를 완성시켜가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항상 되어간다(becoming).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생명의 표현에 쓸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에는 아니다. 생명은 진화하지도 성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진화하는 힘이고 진화자이다. 진화가 진행되는 것은 생명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다른 과정처럼, 진화는 이전 장에서 언급한 주기의 법칙에 따라서 진행된다. 진화의 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현재 진화 주기도 시작했고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지구는 지성체들의 집합체이며 다른 육체처럼 죽음과 윤회를 할 것이다. 인류라고 불려지는 인간의 집합이 다른 지구들에 있던 때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있던 죽어가는 행성이 달이다. 그리고 카르마를 통해서 오래된 육체가 그 용도를 다하면 새로운 육체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들의 집합체도 그 수확을 흡수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 동안 오래된 행성에서 물러나서 에너지 센터들을 내보내고, 그것들은 결국에 나중에 더 심오한 진화를 위해서 새롭고 보다 나은 집을 만들게 된다. 그렇다면 진화에는 끝이 있을까? 배울 힘이 무한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본질적으로 완전하다면, 왜 우리는 진화과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우리가 진화를 경험하고, 진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실수를 경험해야 하는 두 가지 좋은 이유가 있다. 자아(Ego)는 기본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 아니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재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완전성을 얻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그것을 증명해야 하고, 분리심 및 이기심과 대면해서 형제애를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내면의 존재의 일부분인 진리들을 실제 증명해야 한다. 그는 불협화음에서 화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한다: “완전하게 깨어있는 신성한 신이 되기 위해서 아니 심지어 가장 높은 신이 되기 위해서 태초의 영적인 지성적인 존재들(INTELLIGENCES)은 인간의 단계를 지나가야 한다고 가르침은 말한다. 개별 존재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신성하게 될 권리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H.P.B.는 II권에서 같은 주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도발적인 말을 한다: “투쟁이 없는 곳에는 성과도 없다. 완전하게 되는 것은 불완전한 것에서 태어나야 한다. 불멸적인 것은 부패해서 사라지는 것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리고 후자는 매개체이자 토대가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진화는 인간에게 신성이라는 힘들을 자신의 개체성 속에서 만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고, 의식적인 신성한 상태(god-hood)의 위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진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도구(육체 등)들을 구성하는 의식의 점들 혹은 생명체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그들 자신의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를 주도록 한다. 이해하겠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낮은 생명체들”의 진보는 인간의 행동들에 달려 있고, 우리가 영적인 인식을 얻음에 따라, 대자연을 구성하는 지성체들도 그런 인식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세련됨을 얻게 된다. 우리가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이해도가 커감에 따라서 진화의 대계획 속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을 도와줌에 따라서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진화와 영적 진화는 같은 것인가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대자연 속에 삼중 구조의 진화 계획 속에 진화의 세 가지 계획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제는 명백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태양계 속 모든 지점에서 풀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결되어 서로 겹쳐져 있다. 그것들은 모나드(혹은 영적인) 진화, 지성적인 진화 그리고 물질적인 진화이다.” 물론 모나드는 변하지 않지만 다른 두 갈래의 진화가 진보함에 따라서 점점 더 높은 차원의 활동 단계들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모나드도 진보한다. 지성은 인간에게 지성과 의식을 준 마나사-디야니스(Manasa-Dhyanis)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물질의 진화는 육체의 성장 및 완성과 관계된 진화이다. H.P.B.가 계속해서 말하길, “이 세 가지 흐름 각각은 나름 대로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최고의 디야니스 혹은 로고스들(Logoi)에 의해서 안내되고 통치되고 있다. 각각은 위대한 대우주의 소우주인 인간의 구성 요소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들이 서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이 그렇게 복잡한 존재가 된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무엇인가
 
모나드 라는 용어처럼 진화라는 용어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신지학에 의해서 채택되었지만, 또 다른 용어에 친숙해짐으로써 진화에 대한 신지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발산 혹은 방사(emanation)라는 용어이다. 신지학 용어집에서, H.P.B.는 “발산(혹은 방사)의 가르침을 말한다:

발산의 가르침은 한 때는 보편적이었다. 그 가르침은 인도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 이집트 철학자들, 칼데아인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사제들과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가르쳐졌다. 진화론자들은 “불가지 존재(the Unknowable)”의 경계에서 모든 질문들을 멈춘다. 발산론자들은 그 어떤 것도 먼저 내적으로 연관되지 않고는 겉으로 나올 수 없다고 혹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태어나올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잠재성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발산(emanation)이란 생명(LIFE)이 최고 상태인 합일(UNITY)에서 점점 더 분화되어 가장 낮은 세계인 물질계에 도달할 때까지 지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제 진화는 하강(involution)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대한 구조나 조직의 두뇌가 그것과 연결된 모든 것을 자극시키고 활력을 주고 안내하는 것처럼, 생명, 영(Spirit), 지성은 먼저 물질 속에 말려들어야 한다. 모든 진화는 두 가지 근원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불가지자(Unknowable)에 대한 영원하고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잠재적인 진리이고, 둘째, 어두운 시간에서부터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진보이다. 첫째는 “영원히 되어가는(ever becoming)” 무한한 잠재성이고, 둘째는 그 속에 있는 인종과 단위들의 진보 혹은 한계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아는 인류뿐만 아니라 우리 지구의 진화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진보한 혼들도 다 포함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규칙적인 변화를 본다. 즉, 깨어나고 잠들고, 낮과 밤, 활동과 휴식, 그리고 생명과 죽음.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존재라는 깨어나서 활동하는 날이 있고, 잠자는 휴식이라는 밤이 있다. 보편적인 생명은 형태의 우주로 흘러 들어가서 형체가 없는 무체(No-Thing)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영원하고 보이지 않지만 편재하는 유일 생명의 주기적인 들숨과 날숨이다.

활동하는 기간은 만반타라(Manvantara)이고, 휴식하는 기간은 프랄라야(Pralaya)이며, 이것들은 끊임없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분화의 “새벽”은 만반타라의 새벽이고, 주기가 프랄라야와 함께 끝날 때까지 끝없는 진화의 시작이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만반타라 주기의 시작을 어렵지만 간략하게 제시한다:

우주개념(Cosmic ideation) 혹은 우주심(Universal Mind)이 다시 깨어나면서 미분화된 프랄라야 상태에서 우주 물질(Cosmic Substance)의 시초 출현과 동시에 만반타라의 충동이 시작된다. 만반타라 기간 동안 우주 물질은 우주심의 도구이다. 그러면 절대적 지혜는 자신을 우주 개념 속에 반영하고 그 결과로 우주 에너지(포하트(Fohat))가 나타나며, 포하트는 우주 개념이 활동하도록 자극하여 우주 의식의 일 곱 세계에서 시초의 분화를 안내하게 된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이것을 한 단계 나아가 설명한다:


제아무리 높은 정신을 가진 인간이 탐구한다 해도 탐구가 불가능한 미지의 존재에서 우주가 진화해 나오고, 그 우주는 일곱 계 혹은 모든 세계에서 일곱 가지 방식으로 진화해 간다. 우리의 지식은 분화와 함께 시작되며, 현현한 모든 것들, 존재들 혹은 힘들은 “거대한 미지의 존재”의 분화에 불과하다. 시간적 의미의 첫 번째 분화는 ‘영(Spirit)’이고, 그것과 함께 물질과 마인드가 나타난다. 아캬샤는 물질과 영으로부터 생겨나고, 의지는 영의 힘이 활동하는 것이고, 생명은 영에 의해서 물질 위를 움직이는 아캬샤 활동의 결과이다.

마인드는 우주의 지성적인 부분이며, 위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할 일곱 가지 세계들 속에 우주의 계획이 찍혀서 담겨있다. 하나의 세계 혹은 여러 세계가 모여서 만들어진 더 큰 하나의 시스템이 진화해 갈 때마다, 계획이 우주심 안에 세워져 있으며, 원초적인 힘은 영으로부터 오고, 그 토대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다. 그리고 대생명은 생명을 필요로 하는 모든 형태들을 유지해 준다. 또한 아카샤는 물질과 영-마인드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라운드와 인종들은 무엇인가


인류라고 알고 있는 “생명의 파도(Life Wave)”는 라운드(Round)라고 알려진 일련의 일곱 가지 진보 단계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각각의 라운드는 일곱 인종으로 나누어지고 각각의 인종은 일곱 아인종으로 나누어진다. 약간만 계산 해보면 거의 끝없이 많은 숫자들의 조합에 도달할 것이다. 일단 라운드와 인종 그리고 아인종이 인간의 칠중 구조에 상응하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결과로 일어나는 다양한 조합들과 진화와 교육을 위해 필요한 독특한 조건들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고 이런 체계가 진화하는 혼을 위해서 가장 다양한 경험들을 제공해 준다.




다른 관점에서 졋지 씨가 [신지학의 대양]에서 설명한다.

앞 페이지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칠중 구조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며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다. 이와 같이 지구는 칠중 구조를 가진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함께 회전하는 다른 여섯 개의 구체(球體)가 있다. 이 일곱 구체(球體)를 “지구 체인” 혹은 “혹성 체인”이라고 부른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 상태에 따라서만 일곱 구체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곱 개중에 어떤 한 구체에서 활동할 때, 그는 그것을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구체로 인식하고 나머지 여섯 개는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여섯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네 번째 구체인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의 육체는 지구를 나타내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만이 보일 뿐이다. 일곱 구체 전체는 하나의 덩어리 혹은 거대한 구체로 상호 침투해 있다.

편의상 이 구체들을 A, B, C, D, E, F, G 라고 부르자. 생명의 파도인 진화의 충동은 A에서 시작되고, 오랜 발전 기간이 지난 후에 B라는 다른 물질 상태 속에서 경험할 준비가 된다. 그렇게 생명의 파도는 가장 조밀한 물질인 D를 경험하고 점점 더 미세한 구체인 G까지 경험하면서 일곱 구체를 지나간다. 그런 후에 계속 하기 전에 활동의 휴식기인 프랄라야가 있다. 이렇게 일곱 구체를 지나가는 것을 하나의 라운드라고 부른다. 일곱 라운드는 하나의 행성 주기(Planetary Cycle)를 이루며 그 후에 행성 프랄라야(Planetary Pralaya)가 있다.


앞에서 말한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각각의 구체는 해당하는 물질 상태에 적합한 일곱 인종들과 감각들, 능력들 그리고 힘들을 개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했듯이, “라운드는 혹성의식의 일곱 센타를 순환하는 것이다. 인종은 일곱 구체 중의 하나에서 인종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각 구체에는 일곱 인종이 있으며, 총 49 아인종들이 일곱 근본 인종을 형성하게 되고, 각 구체에서 진화하는 일곱 인종들은 사실상 일곱 가지의 구성요소 혹은 일곱 가지의 독특한 기능이나 힘을 가진 하나의 인종이다.”


이런 진화 계획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런 경험의 다양성을 한층 깊게 하기 위해서 각각의 인종은 일곱 아인종을 가지고, 각각의 아인종은 거의 무한한 경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곱 가족-인종(family-race)을 가진다. 우리는 현재 제 4라운드의 제 4근원인종의 제5 아인종에 있다고 한다. 이제 상응의 법칙을 이용하면, 다섯 번째 계가 마나스에 상응하며 네 번째는 카마 혹은 욕망에 대응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현재의 경험은 욕망에 바탕을 둔 정신적, 지성적, 이성적인 활동을 강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주기들이 상호 교차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구 상에 오래된 인종들과 이인종들의 잔여물이 있다고 철학에서 제시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들은 다양한 상태로 분해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역사상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한편 우리를 앞서서 출현하는 미래 인종들과 아인종들인 선구자 인종들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졋지 씨가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한다: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인종 즉 제 6인종이 진화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지구상의 모든 인종들은 지금 거대한 통합의 시기에 있으며, 그 결과로 고도로 발달한 아인종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인종이 완성될 때까지 다른 인종들도 비슷한 과정에 의해서 진화할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세 가지로 구분되는 진화의 계획의 발전을 따라 올라가서, 자의식적이고 사고하는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뭉쳐진 것을 추적해야 한다. 모든 진화의 바탕으로써 잠재하고 있는 모나드가 점진적으로 개화된다. 그것의 진화 여행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응축되어 있고 조건이 있는 물질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영적인 상태로 되돌아 가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경험을 획득해서 가져간다. 이것은 이전 “지구들”로부터 넘어온 패턴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초기 라운드에서 시작된 형태의 진화라는 두 번째 계획 속에 있다. 개개인들로써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이전 환생에서 얻었던 것들을 따라서 형성된 패턴이 있는 체들과 두뇌들 그리고 성향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전체 인류도 이전 만반타라가 끝날 무렵까지 개발할 수 있었던 최상을 나타내는 형태들과 능력들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개체의 초기 진화와 발전은 대체적으로 자동적이기 때문에, 지구에서의 초기 진화는 영적인 부모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자연의 힘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영적인 부모들의 임무는 우리가 계속 진화할 수 있도록 이전에 남겨놓은 것보다 좀 더 나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하길,


이 시점이 바로 정신으로부터 간섭과 지성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도움과 간섭은 있었고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대자연은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신(God)이나 천사가 간섭해서 도와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한 것은 인간이다. 오늘 날의 인간처럼 약하고 무지한 인간이 아니라, 엄청난 힘과 지식 그리고 지혜를 가진 신성하고 고귀한 위대한 혼들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진화의 세 번째 측면, 즉 자의식적이며 사고하는 인간 자신을 소개해야만 한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인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다른 단위처럼 대자연의 점진적인 완전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에 관한 것이다. 인간 속에서 생각하고 살고 있으며 진화의 걸작인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고 있는 그것은 “영원의 순례자(Eternal Pilgrim)”로 알 수 없는 유일의 절대자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분화된 존재이다.

우리의 진화 주기인 전체 일곱 라운드에서 현재 위치는 중간 지점으로, 인간의 하위 네 가지를 구성하는 육체의 진화는 인간의 정신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장은 지금까지 연관된 하위 지성체들에 의해서 준비된 무대에 들어선 자의식적인 인간이 주는 자극과 방향에 달려 있는 유도된 성장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아트마(Atma)와 붓디(Buddhi)인 모나드는 형체들 위해서 내려다 보고 “자기가 만들고 유도한” 행동들 속에서 그 형체들과 합쳐질 때까지 더 이상의 확장의 힘을 경험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두 개를 연결시키고 “천상의 인간(Heavenly Man)”을 완성시키며 인류의 진화의 또 다른 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자아(Ego)와 정신 사이에 연결고리이다. 이것이 제 4라운드의 제 3근원인종의 중간지점이고 우리의 진화에서 희생이 우리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 되는 곳이다. 크로스비 씨는 [보편 신지학(Universal Theosophy)]에서 말하길, “진정한 가르침은 영적인 존재로써 인간 자신이 영계 혹은 영적인 자의식 상태에서 물질의 모든 응집단계들을 거쳐서 한 단계 한 단계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위 왕국들로부터 올라오는 형태의 상승 파도를 만나고, 모든 형태 중에 가장 완전한 형태가 최고의 발전 단계까지 개발되었을 때, 그 형태 속으로 들어간다. 그 “보이지 않는” 인간이 물질적인 도구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혼은 우주의 하위 생명을 흡수하고 영성화시키면서 시대가 흘러가면서 힘이 자라나는 것이다.



인간에게 정신의 불을 준 것이 바로 프로메데우스의 이야기로 인류 자신의 이야기이다. 신성하며 윤회하는 자아를 나타내는 프로메데우스 신은 지금까지 정신이 존재하지 않던 형태들 속에서 사고하는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 정신의 불을 훔쳤다. 그러나 정신적인 암흑으로부터 구원하였지만, 자의식을 가짐으로써 수반되는 모든 고통들도 인간에게 가져왔다; 전체 자연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지식;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해서 오는 고통의 결과들; 생각하는 인간에게 오는 모든 비애들과 고통들. 프로메데우스는 법칙 하에서 이런 고통들이 불가결하다고 받아들였고 혼은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씨크릿 독트린 II]에서 H.P.B.는 가장 신비스러우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

씨크릭 독트린에서 가르치길, “불의 데봐들(Fire-Devas),” “루드라들(Rudras),” 그리고 “쿠마라들(Kumaras),” “처녀-천사들(Virgin-Angels)”1은 존재들(자신의 형제들에게서 나온 그림자들)의 비참함을 보는 것보다 환생의 저주(curse of incarnation)와 지상의 존재 및 재탄생의 긴 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전통 속에서 처음에는 완전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창조된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인간적인 애정과 열망들을 넣어주기 위해서 자신들을 자발적인 희생물로 바치는 천상의 요기들(Yogis)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지구로 내려와서 마하유가(Mahayuga) 전체 주기 동안 지구 상에서 거주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존재의 지복을 지구상에서의 삶의 저주로 교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들과 위대한 가르침들 속에서 한 두 가지 형태로 발견한다. 육체적으로는 완성의 상태에 도달했지만 정신의 원리에는 빛을 붙일 수 없는 형태들 속에 잠재하고 있는 마나스들에 불을 붙이는 데 정신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위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이미 빛을 가지고 있는 누가 형태들 속으로 환생, 즉 희생해야 하고, 자신들의 정신과 정신이 없지만 잠재하고 있는 마나스 원리를 융합시킴으로써 대자연의 하위 생명들과 함께 자의식적인 신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장구한 진화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4장에서 설명한 “마나스에 불을 붙이다.”라는 주제의 이야기 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대자연과 계획들을 수행하는 “달의 아버지들(Lunar Pitris)”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들 속에서 환생하고 있는 “태양의 아버지들(Solar Pitris)”들이기 때문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