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사자의 서 (죽음에 대한 안내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에 대해 미리 알려줌으로써
현명하게 대처하게 만드는 지침서인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티벳 어로 사후 세계인 바르도는 우리 말로 하면 중음계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중음신이 된 사자가 이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고 떠돌게 되면
우리가 흔히 아는 '귀신'이 되므로
미련을 다 버리고 갈 곳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에서 하는 49재도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가도록 제도하는 이런 풍습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염불이나 독경 등의 수행을 많이 하면 이런 과정을 쉽게 통과해서
내생에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지요.

(예전에 유튜브의 시간 제한 때문에 동영상을 잘라서 올렸던 것을
전체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다시 연결해서 올립니다.)

모두들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광명과 지혜광명에 귀의하여
해탈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발원합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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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aldiwkzl703/1439


윤회의 가르침


서구 세계에서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신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윤회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그럴만한 유일한 설명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윤회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오해와 오류가 스며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오래되고 폭 넓은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은 너무도 적은 것이 현실이다.1

 
1875년에 뉴욕에서 설립된 신지학 운동의 공동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블라바츠키 여사는 윤회는 초기 기독교 가르침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으나, 그 이후로 기독교에서 “잃어버린 열쇠”들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서기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혼의 전생 교리를 반대함으로써 윤회의 가르침을 파문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많은 논쟁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유럽 문화가 붕괴하고 암흑의 시대가 도래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 원리와 쌍둥이격인 카르마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의 부활을 통하여 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비참함의 추세가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이 원리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이 두 원리를 희망과 책임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1) 인간의 본성 중 어느 부분이 윤회하는가?


지난 100년 동안 학교나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물질주의가 팽배하다 보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진짜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 왔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의 육체가 곧 우리 자신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윤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바로 개성이라고 생각한다.2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진짜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에 사용하는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태어 나고 죽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실체에 의해 재사용되기 위하여 물질의 저장소로 되돌아 간다.
 
우리는 또한 어느 특정한 시간에 경험하는 감정들도 아니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각들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들이나 감정들도 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평가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한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경험에서 경험으로 옮겨가는 의식은 어떤 다른 무엇, 즉 이러한 육체나 뇌 감정 등을 사용하지만 이러한 도구들과는 전혀 다른 보다 우수한 것임에 틀림없다. ULT의 창시자인 크로스비씨는 [보편 신지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24쪽)
 
“개개인 안에는 모든 육화를 통하여 지속되는 동일한 정체성인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 신지학은 보다 큰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다. 몸도 환경도 변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불변이며 앞으로도 육체나 정신 또는 환경의 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실재이다.”
 
진정한 “나” 또는 “자아”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며, 수많은 육화 또는 개성들을 거치면서 계속 살아 있게 된다. 이 육화와 개성들은 모두 다르지만 영적인 진화를 위하여 모두 중요하다. 경험의 정수를 한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보존하여 갖고 다니는 것이 바로 영속하는 정체성인 자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재능이나 천재성 또는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수많은 삶을 통하여 얻은 경험의 과실이다. 한편 힘과 지혜와 영감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개성이라는 끈질긴 믿음이다. 이 개성은 카르마를 통하여 우리 자신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성격은 그러한 기회들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를 나타낸다.



2) 그렇다면 인간 전체는 무엇인가?


신지학은 이점에 대해 심리학과 종교에서 일어나는 의혹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혼란스러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 불멸하는 상위 자아와 상위 자아의 임시적인 매체이자 도구로써 다른 모든 매체들처럼 결국엔 죽음으로 붕괴되는 하위 자아 혹은 개성으로 구성된 이중구조라고 답한다. 이를 좀더 살펴보자.
 
상위 자아는 영, 영적 혼, 마인드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마, 붓디, 마나스이다) 이 3중체가 삶에서 삶으로 무한한 지식과 힘을 계속해서 확장해나가기 위해 화신하는 진짜 인간이다. 아트마는 정의할 수 없는 만물의 초월적 근원이다. 즉 인격적이고 유한한 ‘신’이 아니라 ‘보편적인 신성 실재’이다. 아트마는 경계 없이 영원하며 언제 어디에나 편재해있으며 무한한 성장력, 인식력, 생성력을 의미한다. 우리들 각자는 본질적으로 그것이다.
 
붓디는 졋지씨에 의하면 분별하고 판단하는 가장 높은 지성을 의미한다. 붓디는 우주심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획득한 신성 혹은 신성한 지성으로 인식된다. 마나스는 생각, 의지, 감정, 기억, 그리고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도구이며, 붓디 혹은 상위 본성을 위하여 사용되거나 카마 혹은 하위 본성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일시적인 하위 자아는 육체, 아스트랄체, 생명원리 그리고 열정과 욕망의 원리 4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각기 루파, 링가 샤리라, 프라나, 카마로 명명된다. 루파(육체)는 이러한 하위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외피에 해당된다. 링가 샤리라는 복잡한 자기장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물질 분자들이 적절한 기능을 하도록 유지하고 있는 전자기적 형체이다. 이것은 육체보다 먼저 나타나고 더 오래 생존하는데, 감각들을 담고있는 실질적인 매체이며, 사실 진실한 의미의 육체이다. 아스트랄 물질은 육체보다 더욱 미세한 성질의 물질이다.
 
프라나는 생명 에너지이다. 이를 [신지학의 대해]에서 인용하면 “프라나는 보편적으로 스며있는 본질로, 지구가 떠다니는 대양과 같다. 그것은 지구와 지구 상의 모든 만물 속에 깃들어 있으며 쉼 없이 영원히 우리 주변에서 맥동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단지 프라나나 지바(jiva)를 다루기 위해 더 특화된 도구를 사용한다. 지바는 보편적인 생명이다. 프라나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환생한 동안 살아있게 하는 개체화된 생명이다.
 
카마는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본질일 것이다. 이것은 열정과 욕구의 본질을 뜻하며 7중 구조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균형의 원리”로 불려진다. 일반적으로 카마는 가장 개발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기저를 형성하는 원리로 이것을 중심으로 성장하거나 퇴보하는 길이 있는 균형점이다.
 
졋지씨는 [신지학의 대해]에서 하위 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네 개의 하위 물질은 서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스스로 붕괴되기도 한다. 서로 분리될 시간이 되면, 결합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육체는 죽으며 4중체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들은 각각 분리되기 시작하여, 뿔뿔이 흩어진 전체 집합체는 이제 더 이상 진정한 인간의 매체로서 사용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이라 불리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죽지 않는 영원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약해보자. 진정한 인간은 아트마-붓디-마나스의 3중체 혹은 영과 마인드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연과 접촉하는데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도구들은 4중체에서 발견되며 각각의 본질은 그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특별한 경험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 중 육체는 가장 하위이며, 가장 일시적인 매체이다.


왜 윤회하는가?

환생은 우리로서는 매우 혜택이 많은 과정이다. 그것은 각자에게 그의 내면에 이루지 못한 채 남아있는 모든 열망들을 꽃피울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몸과 두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한편, 환생의 사이의 기간에 혼은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과 동화를 취할 시간을 갖는다. 환생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난 생에서 그가 취했던 행동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와 환경도 제공한다. 환생을 통하여 대자연을 구성하며 자신들의 진화를 위하여 인간에게 의존하는, 의식을 가진 많은 “생명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환생은 자연 안의 모든 생명체들과의 관계를 주기적으로 쇄신하기 위하여 윤회가 필요하고 그러한 상호의존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은 바로 모든 생명의 근저에 있는 신의 실재 즉 신성과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지학에서 “보편적 형제애는 자연계에서 하나의 사실이다.”라는 명제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똑같은 두뇌와 인식 그리고 감정을 가진 신체 속에 언제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주위의 삶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진보함에 따라 새롭고 보다 나은 건물들과 도구들 그리고 사회들을 건설하며, 옛것들은 재활용을 위하여 해체한다. 자연의 여러 가지 차원에 존재하는 생명과 접촉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똑같은 인격들이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때마다 우리의 인식을 보다 더 넓히고 더 많은 효과를 주는 더욱 개선된 도구들을 만드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 도구들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에게 보다 높은 충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적인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진정으로 실제적인 삶을 사는 방법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과 행위들을 가능한 한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회를 통한 발전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식하는 존재이다. 우리 존재의 뿌리에는 무한한 인지 능력과 탐구력 그리고 성장력인 아트마(혹은 영)가 있다. 이 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한 힘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진정한 자아로서 지식과 이해력을 끝임 없이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는 또한 붓디이다. 그것은 모든 과거 경험들의 총합 혹은 정수로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붓디는 직관과 영감 양심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는 마나스이다. 마나스는 행위의 실제 영역인 멘탈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이것이 아트마-붓디-마나스 혹은 인식자 혹은 윤회하는 자아의 3 가지 측면이며, 모든 진실되고 영속적인 진보가 기록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삼위일체의 내면이다. 그리고 진정한 성장은 이 내적 자아의 지혜를 현상계에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천재>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떠한 자아든 원초의 본질과 본성에서 다른 자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떤 한 인간을 위대한 성인으로 만들거나 또는 강도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외피인 신체의 특질과 구성 및 두뇌와 육체가 진정한 내적 인간의 빛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데 적합한가 부적합 한가에 달려있다. 그런데 이러한 적합성 혹은 부적합성은 카르마의 결과이다”
 
크로스비는 [신지학의 대해에 대한 질의응답]에서 이를 더욱 깊이 설명한다.


“인식하는 자는 인식력과 인식범위에 대한 확장능력을 갖고 있다. 인식하고자 하는 힘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인식들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인식의 영역을 계속 확장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식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인상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증대하는 지성과 더욱 나아지는 형태가 바로 진화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외적인 모습 안에는 언제나 더 큰 잠재력이 있다는 느낌을 경험해 왔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원하는 생각이 아니다. 이 느낌 속에는 거대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 신지학은 모든 과거의 체험과 지식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잠겨져 있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따라서 올바른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캐내어 활용할 수 있다고 신지학은 가르친다. 진정한 진보는 수련에 의해서 그러한 지식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즉 하위 자아의 도구들을 훈련시켜서 완벽하게 조절함으로써 내면의 자아가 지닌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러한 도구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번 생애에서라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보편적인 진정한 토대를 선택해서 확립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올바르고 효과적인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진실되며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 생명의 법칙들에 어긋난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그만큼의 실수로 아로 새겨지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전체 본질을 이해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들, 즉 우주에서의 자신의 목적과 운명을 알게 하는 영원 불멸한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지식이다. 현현해 있는 모든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윤회의 보편적 법칙은 우리의 사고와 인식의 기본 토대들 중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져야 할 근원적인 법칙들 중에 하나이다.


왜 이런 내면의 지혜를 사용하지 못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내면의 지식과 능력의 저장고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만이 삶의 전부이며 혼이나 영은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라야 비로소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 생각의 대부분이 거의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차원, 즉 이기적이며 육체적인 성질과 관계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삶을 통해서 계속 이렇게 훈련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두뇌는 이러한 성격을 갖는 인상이나 메세지들에만 반응을 보이게 된다. 크로스비씨는 말하길, “사람들에게 장벽이 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삶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있다.” 그렇지만 굳은 결심과 위대한 스승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고집해온 스스로를 제한하는 생각들을 내면의 존재의 세계와 조화를 더 잘 이루는 생각들로 대체할 수 있다.
 
이것 없이는 나머지 모두가 물거품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단계이자 첫걸음은 우리는 육체나 두뇌 혹은 인격이 아니라 윤회하는 자아, 즉 아트마-붓디-마나스로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위하여 다양한 인격들을 사용하는 영속적인 정체성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규칙적인 사고와 배움을 통하여 근본적인 본성에서 초월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자애적인 진정한 본성에 관한 내면의 기억을 일깨워야 한다. 결국에는 비이기적인 삶만이 유일한 실용적인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그러한 성질을 띄게 될 것이고, 우리의 두뇌는 혼의 지시에 순응하게 되어 상위 자아로부터 오는 영감에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죽는 순간과 죽고 난 이후에도 우리의 의식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ego)는 인식자로써 어느 계에 있든지 인식 작용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로, 죽고 난 이후에 우리는 결코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 상태”가 바뀌는 것임을 이해해야겠다. 그러나 이 상태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자아는 지금 막 마감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추출하고 간직해야 할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신지학에서는 각각의 매체가 그 동안의 경험의 축적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번의 “죽음들”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졋지 씨는 그 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몸이 차가와 지고 눈이 감겨졌을 때 몸과 마음 안에 있던 모든 힘들은 뇌를 통해 황급히 빠져나가는데, 이때 막 마감한 생애 전체가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전체적인 개략뿐만 아니라 매우 세세한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던 아주 조그마한 인상들까지 모두 다 상세하게 내면의 인간에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어진다. 이 순간에 의사는 모든 징후들이 죽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죽었다고 말할지라도 진짜 인간은 뇌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으며 이 작업이 끝나서야 비로서 그 사람은 죽는 것이다.”
 
홈 스터디 시리즈의 다른 부분에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자아는 겨울에 나무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잎사귀들은 떨어지고 꽃들은 시들어 죽지만, 그 해에 이룩한 성장의 정수는 응축되어 씨앗에 보존되어진다. 이 기간이 바로 자아가 지난 생을 반성해 보고 다음 생을 위하여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 기간이다. 이것은 혼에게 있어서 필요한 시간이며 또 전 인생의 행로와 과정을 이해하고 휴식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다.
 
졋지씨는 자아가 다시 화신할 때에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혼의 힘에 의해 주어진 데바챤(사후 상태 중의 하나)에서의 기간이 끝나게 되면 지구와 묶여 있던 자기적인 끈이 힘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때 자아는 꿈에서 깨어나 빠르게 새로운 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탄생하기 바로 전과 데바챤으로 이끌려서 지금 다시 시작할 새로운 삶으로 되돌아오게 된 모든 이유들을 한 순간에 잠시동안 보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정당하며 자신의 과거 삶의 결과로써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어 불평 없이 다시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 그러면 또 다른 혼이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각주 1

이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보면, 실제로 환생하는 것은 우리의 어느 측면인가 혹은 우리의 어느 부분이 죽고 사라지는가 혹은 이 주기적인 환생의 법칙은 삶 전체 내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리고 이 법칙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이다.

각주 2

개성(personality)은 어원상 persona에서 유래하는 데 그 의미는 ‘마스크’라는 의미이다.

  1. 이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보면, 실제로 환생하는 것은 우리의 어느 측면인가 혹은 우리의 어느 부분이 죽고 사라지는가 혹은 이 주기적인 환생의 법칙은 삶 전체 내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리고 이 법칙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이다. [본문으로]
  2. 개성(personality)은 어원상 persona에서 유래하는 데 그 의미는 ‘마스크’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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