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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랄체에 대하여


육체 아스트랄체




일반 과학자들과 오컬트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가장 큰 이슈는 육체 속에 있는 아스트랄체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육체가 없어도 존재한다.


[씨크릿 독트린 II, 149]


육체보다 아스트랄체가 먼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어떤 형태의 물체를 형성하는 데 필수라는 것은 내면의 삶이 원인이고 눈에 보이는 외면은 항상 결과라는 것을 긍극적으로 깨닫는데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육체 그 자체로는 기능 할 수 없고 심지어 근본적인 아스트랄체 없이는 그 구조를 유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과학에서 이것을 더 빨리 이해하면 할수록 많은 신비한 문제들을 푸는 열쇠를 더 빨리 갖게 될 것이다.


덧없는 육체 속에 아스트랄체가 있다는 것은 얼마 전까지 하나의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 과학계에 물질주의를 세웠으며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에는 아무런 여지가 없는 기계적인 운동법칙에 따라서 모든 물질 입자들과 유기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였다.


그러나 물질주의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해 전에 세계의 주도적인 과학자들 중에 한 명인 로버트 밀리칸은 물리학에서 일련의 중요한 발견들을 자세하게 열거하면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칙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원자 현상과 상대성이론으로 끝을 맺으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물리학에서의 독단적인 물질주의는 죽었다.” 물질주의로부터 떨어지는 다음 단계는 1938년 아인슈타인이 말했을 때이다: “서서히 그리고 힘겹게 장(field)의 개념이 스스로 선도하는 위치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적인 개념들 중에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근대 물리학자에게 전자기장은 고학자가 앉아 있는 의자만큼이나 실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외부 껍데기 보가 근저에 깔려있는 자성적인 장이 훨씬 더 실재적이라면 육체의 기능과 중요성은 무엇인가?

육체는 무엇인가


졋지 씨의 [신지학의 대양] 36 페이지에서 육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전체 구성 요소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이고 영속하지 않으며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부분에 있는 것이 항상 변하고 있어서 사실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비록 만질 수 있을 지라도 끝 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체는 진화의 현재 단계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질계에서 생명을 접촉하고 경험을 얻는 방법이며 또한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들을 돕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체가 근육, 뼈, 신경, 혈액 그리고 뇌 물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일정 기간 동안 이런 역할을 채운 후 진화의 다른 주기로 넘어가는 수많은 “생명들” 혹은 지성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7년을 주기로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대체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생명들은 자연에서 다양한 형태 속에서 수 많은 세월 동안 수련과 경험을 겪어왔으며 이제 인간의 형태 속에서 활동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과거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의 일부분이며 매우 높은 수준의 축적된 지성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성 때문에 두뇌로부터 받는 엄청나게 복잡한 요구들에 대응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들을 구성하는 그것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동안에는 우리들의 책임이며, 우리가 주는 성향이나 취향에 대해서도 우리의 책임이다. 이런 생명체들이 신체를 떠날 때 우리가 준 성향을 가지고 위대한 대자연의 많은 형태들 속으로 돌아간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자성적인 인력 때문에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진화의 보편적인 과정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지학의 대양] 35 페이지에서 졋지 씨는 이런 생명체들에 대해서 말한다:
 
육체적인 삶의 신비들 중에 하나가 이런 “생명들” 속에 숨겨져 있다. 프라나 혹은 지바(Jiva)라고 불려지는 생명 에너지에 의해서 억지로 강요된 그들의 행동이 활동적인 존재와 육체적인 죽음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파괴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자들이다. 이 두 부류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결국에는 파괴자가 승리할 때까지 서로 전쟁을 한다.
 
우리가 잠잘 때 우리는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깨어나서 활동하면, 마치 전구 속에 있는 필라멘트가 빛을 만들기 위해서 전기의 흐름에 저항하듯이 우리는 에너지의 흐름에 저항해야 한다. 필라멘트가 결국에는 저항할 수 없듯이, 결국에는 육체 속에 있는 생명들로 생명의 힘에 저장할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되어 생명 자체가 육체를 죽이게 된다.
 
졋지 씨가 말하길, “생명은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원리이다. 지구는 바로 그 대양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생명은 구체 전체뿐만 아니라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물체와 존재에 침해해 있다.” 우리가 육체 속으로 윤회할 때, 이 보편적으로 고동치는 생명의 힘을 육체를 보존하는 특화된 에너지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도구 혹은 매개체가 필요하다. 산스크리트로 이런 보편 생명을 지바(Jiva)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화된 생명을 프라나(Prana)라고 부른다. 죽음으로 생명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다른 특화된 생명에 의해서 사용되기 위해서 보편적인 형태로 돌아간다.

아스트랄체는 무엇인가

위에 모든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매개체에 달려있다. 즉 보편적인 생명력을 개인적인 활력으로 변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움직이는 물질이 형체를 견고하게 유지하도록 해주는 육체의 원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이다. 그것에 대해서 많은 이름으로 불렀다. 에텔복체, 유령, 도플갱어 등등. 그러나 가장 좋은 이름이 아마도 산스크리트 이름인 “링가 샤리라(Linga Sarira)”이다. 그 의미는 도안체(design body)이다. 그것은 육체의 모형이며 사실 진정한 육체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하에서는 육체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아스트랄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아스트랄체의 물질이 별들을 구성하는 물질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개략적으로 말하면 전자기 “장(field)”이다. 졋지 씨가 아스트랄체에 구성 요소에 대해서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하길:


아스트랄체는 눈에 보이는 육체와 비교해서 매우 미세한 구조를 갖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신장강도를 가지고 있어서 육체에 비해서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당히 먼 거리까지 늘어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아스트랄체는 유연하고 탄력적이고 확장이 가능하며 강하다. 아스트랄체는 구성하는 물질은 본질적으로는 전자기적인 물질이며 인간을 위해서 물질체를 만들어내는 시점에 진화 과정이 도달하기 전 오랜 과거에는 전체 세계가 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잡한 물질이 아니다. 엄청난 진화의 시기를 거치고 셀 수 없는 만큼의 정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 성질은 우리가 육체적인 눈과 손으로 만지거나 보는 물질 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다.


위에서 아스트랄체가 사실 진정한 육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잠을 자거나 트랜스 상태나 최면 상태에 있을 때 완전하며 활동하는 내면의 감각들이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진정한 감각들은 아스트랄체 속에 있다. 그리고 외적인 감각들은 단지 물질계의 물질과 접촉하기 위한 것이다. 졋지 씨는 첨언해서 말하길, “육체에서 혈액에 해당하는 아스트랄체의 아스트랄 유액(fluid)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나름대로의 혈관들과 신경체계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개성을 가진 인간이다. 오늘날 최면하는 사람들이 다루고 올라는 잠재의식적인 인식과 잠재적인 기억이 있다.”


아스트랄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아스트랄체는 육체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며 육체가 만들어진 모형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존재인 정신도 내면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로써 아스트랄체를 투사시킨다. 아스트랄체를 형성하는 것도 물론 자아의 개별 카르마에 따라서 안내를 받으며 개별 카르마는 다음 환생을 위한 적합한 조건들을 만든다. 또한 이전 육체 속에 있는 동안 형성된 성격의 특이성들인 스칸다(skandhas)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스칸다들은 우리들이 죽을 때 떠나고 태어날 때 다시 만나는 지금까지 배운 교훈들과 아직 배우지 못한 교훈들의 기억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스트랄체들을 만든다. 그러나 아스트랄체의 형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주변적인 변화만 가능 수준까지 제한되어 있어서 전반적인 형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생각과 행위들의 영향은 기본적인 형체를 세련되게 만들거나 부패시키는데 제한적이다. H.P.B.는 [씨크릿 독트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들은 아스트랄 혹은 에텔 원형으로 영원 속에 존재해왔다… 오컬티즘에서 가르치길, 이상적인 형태가 주관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도 인간도 자연도 줄 수가 없다. 최소한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나 형체도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 올 수 없으며 상상 속에서 진화할 수 없다.



우리는 아스트랄체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나?


아스트랄체는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으며 날카로운 칼이나 강한 산으로도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과 감정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는다. 태아가 발달하는 초기에 엄마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 강한 감정으로는 아기의 아스트랄체에 영향을 주어서 표시를 남기거나 어쩌면 기형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아기를 낳을 어머니 근처에 아름다운 동상을 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스트랄체 아니 아스트랄체의 기능이 우리들의 생각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졋지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감각들은 아스트랄체 속에 그 뿌리가 있으며 우리들 감각 보다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감각은 수 천 배나 훨씬 확장적이다.” 그가 계속 설명하길, “보통의 건강한 사람의 경우 이런 아스트랄 감각들은 육체와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으며 깨어 있는 동안 그 도구에 제한을 받는다.” 이런 외적인 기관들이 잠이나 다른 최면적인 과정으로 무기력화될 때 내면의 인간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무한한 비전을 제시해 준다.


한편 이런 아스트랄 감각들을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우리들의 미래 진화의 일부분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사람들이 따르게 될 그런 방법이다. [집중의 문화]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설명하길, 정신의 집중력을 고양시킴으로써 우리는 서서히 내면의 감각들을 외적인 감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내면의 감각들이 그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우리들의 내면의 힘들을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런 힌트를 제시해 준다.


우리들 내면에는 분별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개발하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알 수 있다.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은 오컬티즘을 가르치는 스승들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은 집중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마치 신체 기관들이 제 기능들을 다 하기 위해서 신체가 성숙해져야 하듯이,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내면의 인간도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거나 믿지 않는다. 여기 “내면의 인간”은 앞에서 말한 “이쉬바라”인 “상위 자아”가 아니라 우리가 종종 “혼” 혹은 아스트랄 인간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을 말한다.


두 번째 부분인 내면의 인간이 이런 모든 능력들과 힘들을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힘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 아직 깨어나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만 개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내면의 존재는 우리 육체와 서로 떨어트릴 수 없게 한 올 한 올 엉켜 있다.


보통 이 내면의 기관들과 외면의 기관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내면의 기관이 외면의 기관과 너무나 조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집중하기 시작할 때 내면의 다른 기관들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육체적인 기관들의 사슬로부터 분리하려고 한다. 이렇게 그 사람은 자신의 힘들을 복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육체의 기관들은 하나도 해를 입지 않으며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여전히 그 기관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기관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집중이 완전하게 될 때, 보통 때는 우리를 피해 지나가는 그런 지식들이 이제는 우리들이 뻗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우리가 있게 된다.


이 글에서 졋지 씨는 경고를 부가적으로 말한다. 즉 분노는 이런 집중의 결과들을 파괴할 것이고, 특히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된 아스트랄체가 그 형체를 잃게 되어 육체 속으로 다시 날아들어갈 것이며 육체 속에 얽히게 되어 구속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가 말하길, 시기, 허영 그리고 두려움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통제되거나 근절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들의 감정들을 통제하고 감각이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지배력을 깨버리는 것이 이런 개발의 필수 조건인 것 같다.


아스트랄체의 힘들에는 어떤 것이 있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스트랄체는 육체 속에 있는 감각들의 “원조들”인 완전한 감각들과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세련되고 발달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힘은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다른 기능들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들의 인식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이다. 내면의 감각들이 이런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간과 공간의 장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파시, 투시력 그리고 투청력의 기능들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기능들이다. 그리고 내면의 감각들은 이미 일어난 원인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어느 정도는 미래 속을 내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광범위하고 깊은 지각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자아의 분별력을 위한 통로를 제공해 주게 된다.


삶의 모든 사건들의 기억들과 그림들이 기록되고 저장되는 곳은 아스트랄계이다.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아스트랄체는 이런 그림들과 소리들 그리고 감정들을 접촉할 수 있다. 수련을 닦은 초인에게 이런 것들은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는 수련이 안된 심령가들은 그것들에 혼란스럽지만 매혹을 느끼게 된다.


아스트랄체에 기인한 많은 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육체에서 다리를 밀어낼 수 있는 능력, 육체를 나와서 먼 거리까지 여행할 수 있는 능력, 볼 수 있게 해서 다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 등.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지만, 순수한 동기 및 인격과 함께 이런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없이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혼의 외피]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이런 외피들 중에 하나로써 아스트랄체의 정상적인 기능과 위치에 대해서 제시해 준다. 그가 말하길;


태양계에서 현재의 진화가 시작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혼은 자신에게 맞는 다양한 덮개들을 만들었다.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에 근접한 매우 미세한 것에서부터 외부에서 볼 때는 가장 진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덮개들 중에서 가장 환영이 많은 육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혼이 알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런 덮개들 혹은 외피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혼 혼자로는 대자연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덮개들을 통해서 모든 감동 혹은 감흥들과 생각들을 즉시 변형시킨다. 그 과정에서 혼이 육체를 지시해서 자신은 경험을 얻는다.


아스트랄체는 이런 외피들 중에 하나이고 다음 상위계로 감각들을 번역하거나 보고하는 기능을 하며, 마찬가지로 내면의 인간의 명령들을 신경들과 근육 등 육체 인간에게 번역해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비록 아스트랄체가 모든 감각들과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아가 물질계에서의 생명을 접촉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육체 없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 물질 그 자체가 여전히 아스트랄 상태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가장 외곽의 매체가 아스트랄체 이었던 때가 있었다. 인류 전체가 물질의 환영을 볼 때가 올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이런 미세한 아스트랄체 속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내면의 세계에서 살고 활동하는 진보된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그 분들은 초인들이고 대스승들이며 육체라는 매개체의 필요성이 없는, 내면의 세계에서 일을 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그 분들 중에 육체를 가지고 물질계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 의사 소통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분들은 필요할 때마다 육체를 떠나서 양쪽 세계에서 골고루 활동하는 분들이라고 한다.



아스트랄체를 개선시키거나 오염시킬 수 있는가


일단 아스트랄체가 활동하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아스트랄체가 진정한 육체이고 욕망의 성질과 하위 마인드의 활동들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열하고 더러운 생각들과 감정들로 아스트랄체를 오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내면의 아스트랄 감각들을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종종 이런 일은 그런 감각들이 존재하지 않다고 혹은 내면의 존재가 없다고 믿음으로써 일어난다. 우리는 그런 지식이 없어서 혹은 물질적인 편견에 의해서, 육체적인 감각들의 대상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반전시켜 왔다. 이런 집착은 내면의 감각들을 외적인 감각들에 가둬두는 효과가 있으며 그래서 그 내면의 감각들을 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지고자에 대한 지각을 얻는 열쇠로 활동의 결과에 대한 초연함의 가치를 말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아스트랄체를 바꾸거나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조절(집중)을 통해서 영원한 아스트랄체를 만드는 과정이며 언젠가는 시작해야 할 절차이므로 상당히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런 시도에 의해서 개개인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기억들과 능력들을 유지할 수 있는 아스트랄체를 창조할 수 있다.


크로스비 씨는 [친절한 철학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정신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고 내면의 인간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알기를 원하게 되자마자, 그 노력과 자세로 인해서 힘과 견실함이 증가하게 된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신체의 기관들이 주위로 만들어지는 힘의 센터였던 것이, 이제는 분리된 아스트랄 기관들이 되도록 만들어진다. 그 기관들을 만드는 과정은 육체의 모든 기관들이 아스트랄체에 완전하게 통합되어 그 노력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 내면에서 서서히 진행된다. 그러면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의 부침 이상이 된다. 이제 우리는 아스트랄체가 행동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여기 물질계에 있는 육체 보다 아스트랄계에서 훨씬 더 완전하고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일곱 가지 초감각들을 가지고 더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상의 아스트랄체가 있는가


육체는 매일 깨어 있는 의식 상태로 단지 하나의 의식 상태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아스트랄체는 훨씬 더 넓은 활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의식 상태들과 칠중 구조의 여러 가지 내면의 원리들을 표현하기 위한 힘들과 물질을 제공해야 한다. 생명의 단계들이 다양하다는 사실 때문에, 특화된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다양하다. 가르침에서 말하길, 여러 가지 아스트랄체 혹은 일곱 개의 아스트랄체가 있다고 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진 하나의 아스트랄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새로운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특정한 체가 변하게 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크로스비 씨는 [신지학의 대양]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다.


아스트랄체는 단순히 포괄적인 총칭이다. “아스트랄”이라는 용어는 물질을 넘어서 있는 모든 것들에 사용된다. 그러나 물질계에서 흙, 물, 공기 그리고 불이 있듯이, 아스트랄계에도 유사한 분류로 나누어져 있다. 흙에 대응하는 아스트랄 형체는 육체를 침투해서 육체와 함께 같이 있다. 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스트랄 물질의 상태이고, 카마-루파를 형성한다. 공기에 상응하는 것은 마나스 체이고, 불에 대응하는 것은 사고자의 체로 의식의 자리이다.


아스트랄체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류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지만, 지성적이고 유연한 성질 때문에 인간의 영적인 면과 물질적인 덮개 사이를 연결하고 해석하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내면의 훨씬 더 미세한 물질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트랄체”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스트랄체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는가


과학의 구조를 급변시키는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확립 체계로서 과학이 어려움을 갖는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심리학이나 의학과 같은 다른 학문들이 아스트랄체를 자신들이 하는 연구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볼 때, 그 때가 되야 비로서 과학에서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근접한 과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신지학의 입장에 근접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런 과학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일 대학교의 H.S. 버(Burr) 박사와 노오스롭(Northrop) 박사로, 1939년에 “생명의 전자-역학이론”에 근거한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1939년 뉴욕타임즈 과학편집자가 쓴 기사에서 일부를 발췌한다.


구체적으로 미리 정해진 패턴에 따라서 개개인을 만들고, 배아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육체 속에 있는 전자기적 건축가가 살아 있는 사물들의 몸 속에 존재한다. 신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변화를 한다. 뇌 세포를 제외하고 신체를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개개의 세포들은 성장해서 죽고, 다른 세포들로 대체된다. 그러나 전자기적인 건축가는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유일하게 안정적이다. 새로운 세포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원래 세포들과 비슷한 패턴에 따라서 조직화시키고 이렇게 계속해서 신체를 지속적으로 창조한다. 내면에 있는 전자기적인 건축가가 기능을 멈추게 될 후에 죽음이 오게 된다.


전자기적인 건축가는 생명의 성질과 살아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다. 마치 자석이 그 주위에 자기력의 장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은 개개의 살아 있는 유기체는 전기 역학의 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버 박사에 따르면, 실험의 증거를 보면 동물들 개체들과 그 개체들 속에 있는 개개 세포들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 전기 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체를 상호 침투하는 전자기적인 패턴의 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다른 과학자들은 소련에 있던 과학자들로, 소위 킬리안(Kirlian) 사진을 가지고 식물의 아스트랄체를 찍을 수 있었던 과학자들이다.


또 다른 돌파구가 1981년 생명의 신과학에서 루퍼트 쉘드레이크(Rupert Sheldrake)에 의해서 있었다. 그는 생물학에 대한 현재의 정통적인 접근 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형태의 신비를 설명하는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형태 발생의 장이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물리적인 영향을 주며, 이런 장들이 모든 복잡한 단계에서 특이한 형태나 유기체를 조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 장들은 패전이 있는 제약을 에너지적으로 물리적인 과정의 결과가 가능하도록 제약을 가한다.



죽은 후에 아스트랄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의 죽음으로 아스트랄체의 가장 하위 측면이 육체와 함께 분해된다. 이것이 바로 물리적인 분자들을 위한 틀을 형성하는 “장(場)”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응집력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덤 근처에서 종종 목격되는 유령이다.


이 체의 또 다른 측면은 욕망체를 의미하는 카마루파(Kama Rupa)이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죽을 때 떠나는 욕망들과 열정들의 일시적인 매개체로서 형성되는 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것보다 더 오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 또한 진정한 인간인 상위 삼개조(Higher Triad)가 인간의 네 번째 원리인 이 성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자마자 분해하게 된다. H.P.B.는 용어집에서 말한다. “인간의 창백한 복사본이었던 것이 일정 시간 동안 식물같이 살아가는데, 그 기간은 다양하며 그 속에 남겨진 물질의 구성요소와 죽은 사람의 과거 생에 따라서 결정된다. 상위 정신과 영 그리고 육체적인 감각들이 없기 때문에 무감각한 도구로 남겨지면 서서히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령”으로 불려지는 것이고, 영매에 의해서 다시 활성화되어 기억 속에 있는 기억들을 내주기 때문에 영적인 강령회에서 참석한 사람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영이 아니다. 영은 이미 떠났고 이 세계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




욕망과 열정의 원리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카마(욕망과 열정)는 육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원리이며, 육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카마는 인간의 칠중 구조의 네 번째 원리로, 그것을 중심으로 위로 올라가는 혹은 아래로 내려가는 균형의 원리이다. 졋지 씨는 그것이 행동의 토대이고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잘하거나 못하거나 먼저 우리들 내면에 있는 욕망을 일깨워야 한다. 결국에 성인이 되는 사람도 많은 삶들 중에서 어느 한 때 신성한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계속 하기 위해서 진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살려야 한다.” 카마를 개인의 욕망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사악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욕망들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카마의 다른 면이 있다. 다시 용어집에서 보면, “카마는 보편적인 선과 사랑 그리고 살아 있고 느끼는 만물과 도움 및 친절을 필요로 하는 만물에 대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최초의 의식적인 욕망이고, 절대자로부터 나온 하나의 광선이 되어 생명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창조적인 유일의 힘의 의식 속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무한한 자비와 동정이라는 첫 번째 감정이다. 카마는 행복과 사랑을 창조하는 신성한 욕망이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인류가 웅대한 이상들을 미리 결정된 도그마로 인격화시킴으로써 물질화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카마는 동물적인 계에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힘으로 되어 버렸다.”



카마가 두 가지 측면, 즉 하나는 낮은 측면, 다른 하나는 높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이 전적으로 하위에 있으며 물질적인 것들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런 성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물 성향을 자극하여 우리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의식이 최고로 고귀한 열망과 비이기적인 욕망들에 집중되어 있을 때, 카마가 변형되고 영의 힘이 붓디 성질로부터 오게 된다. 이기적인 욕망들에 대한 집착으로 물질계와 물질적인 감각들을 제외하고는 지각 영역을 닫아 버리게 된다. 이런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면 내면의 감각들의 영역과 붓디 성질의 분별력 그리고 수많은 생의 복합적인 결과의 판단력이 열리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서 있듯이, 카마와 붓디는 마나스가 중간에 서있는 서로 반대되는 싹이다. 그래서 카마를 건설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만드는 것은 마나스적인 자아이다. 카마는 활동하는 물질 에너지 힘을 나타내고, 그 힘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진화에서 앞으로 나아가거나 반대 방향으로 떠 가거나 한다. [신지학의 대해[에서 열정과 욕망들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제시해 준다.



아스트랄체와 함께 열정 및 욕망은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그 발달 정도가 아직은 희미한 식물계에도 존재한다. 진화상의 어떤 한 시기에 정신, 혼, 영의 상위 원리가 잠재해 있었고, 다른 물질적 원리들의 발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 시점까지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동등하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있는 동물은 열정과 아스트랄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차이를 의미하는 정신의 싹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 내면의 신은 마나스로부터 시작되며, 바로 신지학에서 자주 언급하거나 경고하는 싸움이 바로 이 신과 하위 동물간의 싸움이다. 하위 원리는 상위 원리와 비교해서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행동의 기반이 된다. 우리는 더 잘하려는 욕망으로 자신을 먼저 나타내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것을 ‘라자스’, 즉 활동적이며 나쁜 속성이라고 부르며, 어둠과 무관심의 속성인 ‘타마스’와 구별된다. 라자스가 있어서 충동을 주지 않으면 인간은 일어설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열정의 원리를 이용함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상위 특성들이 욕망들을 세련되게 만들고 고양시켜서, 그 욕망들이 진리와 영에 지속적으로 놓여질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지학은 열정을 탐닉하거나 지칠 때까지 충족시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유해한 가르침은 없었기 때문이다. 요점은 이기심과 무관심 속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어두움의 속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상승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원리가 주는 활동성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를 움직이고 조절하길 원하면 먼저 욕망을 일깨워야 한다고 신지학은 말한다. 그 욕망은 낮은 성질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봉사에 삶에 대한 욕망이다. 심지어 붓다나 예수로 과거 오래 전에 이 세계를 돕고자 하는 욕망을 깨워서 그 욕망을 수많은 생 동안 살아 있도록 지켰다고 들었다.


우리는 맹세의 힘과 가치에 대해서 많이 듣는다. 중요한 것은 상충되는 목적들을 거부하고 의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함축하는 것을 이루고자 필요한 노력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이 욕망의 원리를 재생 혹은 영성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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