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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삼국의 활동무대는 중국대륙일수도) (박창범)



(출처) 異論/異說 주간동아 1998-12-03 0161호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검증한 결과
삼국의 활동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밝혀냈다.

이같은 결과가 애초의 연구목적은 아니었다.

박교수는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베꼈거나 꾸며낸 것이라는 일본 천문학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박교수는
이를 검증하기 위해 삼국시대의 천문상태를 재현한 프로그램을 짜고
이를 대학의 중앙컴퓨터에 연결해 가동시켰다.


시간이 흘러 방대한 관측결과가 나타나자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과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
일식현상
등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정확하게 컴퓨터의 계산과 일치했으며,
이들은 중국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록이었다.

삼국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그런데 실험결과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삼국에서 주기적으로 관측한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최적 관측지점이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동부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

초기 신라의 경우 중국의 양쯔강 유역,
백제는 발해만 유역,
고구려는 백제보다 더 북방에 최적 관측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결과에 대해 박교수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이를 근거로 삼국의 무대가 중국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

그는
“내 역할은 과학적인 실험결과를 제시하는데까지며,
삼국의 관측지점이 왜 중국 동부에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몫“

이라고 말한다.


아직 학계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그것도 다른 분야의 학자가 제기한―
「돌출적인」 이론이 일반인에게 직접 소개되면
불필요한 오해와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의 내용 가운데 40% 정도는 자연현상과 관련된 기록인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나머지 60%의 기록만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쉽다“

며 그 「40%」의 가치와 효용성을 강조했다.



('97 월간동아 2월호 기사중 일부)


"삼국시대 천문관측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후
국사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천문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

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근거가 없는지를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결과만 놓고 말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장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들만의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내학자 발견 초신성, IAU서 공식인증 받아)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초신성이
국내 최초로 국제천문연맹(IAU)으로부터 공식 인증을 받았다.

서울대 천문학과의 초신성 탐사팀(이명균·박창범 교수)은

지구로부터 약 10억 광년 떨어진
아벨 은하단 2065(천문학자 아벨이 작성한 은하단 목록에서 2065번)내
중심부의 거대한 은하에서 지난 6월 18일 발견한 초신성이
지난 14일 IAU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았다고 20일 발표했다.

IAU는 18.8등급의 매우 밝은 이 초신성의 이름을
「SN 1999DM」으로 명명하고 지난 14일자(미국시간)
국제천문연맹회람 7237호에 게재했다.



(박창범 교수 서울대 떠나)


(출처) 한국일보 2003-09-30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가
기초과학 분야의 열악한 연구환경,
학문 연구 이외의 과도한 잡무 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서울대 교수직을 버렸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박창범(43ㆍ천문학)교수는
8월말 오랜 번민 끝에 관악산 기슭의 연구실을 깨끗이 비웠다.

그는 9월1일자로 고등과학원(KIAS) 물리학부로 자리를 옮겼다.
박 교수는 황준묵(수학부) 이기명(물리학부) 강석진(수학부) 교수에 이어
고등과학원으로 이직한 네 번째 서울대 교수로 기록됐다.

동료 교수들은 그의 이직에 큰 충격을 받았다.

92년 2월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박 교수는
손꼽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이론 천체물리학자.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유학하던 1990년

우주 거대 구조의 진화를 규명하기 위한 그의 빅뱅 모의실험결과는
실제 우주의 모습과 일치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이
연구결과를 머릿기사로 소개하는 등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98년 학술논문의 국제적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인
국제과학논문인용목록(SCI) 지수 조사결과
그의 논문은 서울대 물리화학 분야 논문 가운데 최다인용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박 교수가 서울대를 떠난 것은
“좀 더 연구다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의 한 제자는
“교수님께서 종종 ‘사무 처리가 너무 많아 연구에 집중을 못하겠다’고 푸념하셨다”고
말했다.


서울대 천문학 전공 주임인 이명균 교수도
“학과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라 여러 교수님들이 이직을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연구욕까지 막을 수 없었다”고 탄식했다.

서울대의 구조적 문제도 이직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두뇌한국(BK) 21’ 사업 시행 이후 사실상 전공이 사라지자 학생 지도에 어려움이 컸다.

박 교수는
“학부생 가운데 상당수가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는데 BK21 시행 후 학생수가 크게 줄었다”
며 “학부에 전공이 있는데도 정작 대학원에는 전공이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연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 부족도 서울대 재직시절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1년 연구비가 학생 지원금 지급에 모두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열악한 연구환경을 아쉬워했다.

서울대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활동을 했던 박 교수는
5년째 복직 투쟁중인 김민수 전 미대 교수에 대한 학교측의 무성의함에도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김 전 교수 복직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무엇보다 천막 농성중인 김 교수를 두고 떠나게 돼 가장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박교수 홈페이지에 올려진 인사글)

http://astro.snu.ac.kr/~cbp/bbs.htm

2003/9/26(금) 14:14


제 근무지가 바뀌었습니다 !  


제가 이번 9월 1일자로
고등과학원(KIAS)의 물리학부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새 이메일 주소는 cbp@kias.re.kr 입니다.

그리고 이 홈페이지는 당분간 유지됩니다.
언젠가는 서버를
옮기고 주소도 바꿀 예정입니다.

(박창범)



(자연현상 기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


- 1994년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식 논문 발표전 내용이다


고려시대에 집필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삼국시대에 일어난

일식(日蝕)이 67회,
행성(行星)운동의 이상현상이 40회,
혜성(彗星)의 출현이 63회,
유성(流星)과 운석(隕石)의 낙하가 42회,
기타 14회 등

총 226회의 많은 천체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사서에도 나타나는 이러한 천문현상 기록들은
각 국 고대과학의 수준과 역사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천문현상에 대한 우리의 고대 기록들은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다.

그런데
이 천문현상 기록들은 순수 과학적인 그리고 과학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학에도 그 응용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천체에 대한 기록을 당시 주변 국가들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써
과학 문물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또한 특정 국가가 남긴 천체 관측 기록을 분석하여
정세변화, 강역의 위치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천문현상 기록뿐만 아니라,
지진(地震), 홍수(洪水(, 태풍(颱風) 등의
기상학적, 지질학적 기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자연현상 기록은 다양한 가치를 갖는다.

이 기록들을 이용하여
본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천체 관측 기록으로부터 관측을 수행한 나라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일식과 같은 현상의 경우 달 그림자가 지구상의 모든 곳에 드리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만 식(蝕)의 진행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여러 해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관측자의 위치,
곧 그 국가의 위치가 되리라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일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는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들에 대응하는 천체역학적으로 계산한
실제 일식들의 진행상황을 동아시아 전역에서 조사하여,
그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를 찾는 방법이다.


다음 쪽에 나오는 세 도표의 평균 식분도는
신라(24회)와
백제(19회)와
고구려(8회)

에서 기록한 일식 중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들의 평균식분을 보여준다.

윤곽선 안쪽 지역으로 갈수록 평균식분이 크며,
이것은 곧 그 기록을 남긴 국가의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의 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이,
세 경우 모두 한반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식 기록 횟수가 적은 고구려의 경우에는
최적 관측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백제나 신라의 경우보다 북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적 관측지가 확실히 보이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각국의 관측자가 발해만과 양자강 유역에 각각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의 위치를 찾기 위한 두 번째 방법으로는

앞의 방법과 정반대로 개개의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지역을
바로 그 국가의 위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 쪽의 세 도표에서 잔 점들을 찍은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1개, 2개 또는 그 이상의 일식들은 기록이 되어있음에도
볼 수 없는 지역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 기록된 일식을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앞에서 보인 최적 관측지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관측자가 경주에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관측 가능한 24개 일식 중 2개를 전혀 볼 수 없다.





백제와 신라가
현재 중국의 동쪽 지방에 있었다는 생각은
최근 일부 재야 사학가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그들의 주장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천체 관측만을 이용한 본 연구 내용에서만 생각하면,
왜 기존 역사관과 달리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중국대륙에 있다는 결과가 나왔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기록이 중국기록을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다.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연구되어왔다.

천체역학적 계산과 사료 비교를 통해
그들은 적어도 5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천문현상 기록들은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191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과학사 서적들에도
이런 주장이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구미에서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같은 문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제와 신라가 실제로 중국대륙 동부에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일식기록도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 관측 기록들일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 연구의 결과는 삼국의 위치가 분명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는 심하게 왜곡된 것이고,
바로 잡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진실에서 벗어나
이(異)민족이 보고 싶은 대로 왜곡시켜 후손에게 전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완)


이 강의록은 논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발표된 것입니다

이후 박교수는  
삼국사기 천체기록은 일본놈들 말처럼 베낀 것이 아닌 독자기록임을 입증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운영자인 저도 네티즌 여러분들로부터 수많은 메일과 질의를
받은바 있습니다


박창범 교수 연구결과에 대하여

(1) 학계의 반박논문은 없느냐 ?
(2) 왜 학계에서 반응이 없느냐 ?
94년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과학적 연구결과가 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느냐 ?

저는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1) 94년 이후 반박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
왜냐면 과학적으로 증빙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지구상 어느천문학자가 연구하여도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2) 학계가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운영자 혼자생각)

철저한 무대응으로 일반인들이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날때마다 OO대 주변인사들을 움직여 박교수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결국 2003년 그들은 해내었다


박교수의 연구결과는 잊혀지지 않을것이며 우리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유물) 산동성에 발견된 치우천자의 무덤
(기록) 정사에 기록된 대륙의 동이강역
(과학) 일식의 관측위치가 대륙

3자가 일치하는 동이의 대륙사는 반드시 복원될 것입니다
박창범/라대일 교수가 개척한 “고천문학” 분야는
동양삼국의 제일 귀중한 연구자료로 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 연구에 매진하시길 기대합니다
운영자 혼자생각이지만
매국식민사학자들이 판을 치는 그곳에서
집요한 그들의 괴롭힘에 시달렸을 박교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길 바라겠지만
운영자가 오래전에 전해들은 말들.........
그것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OOO의 고백)

“O교수는 국내에서 보배와 같은 천문학자이고 자랑스런 후배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다.
그뜻은 맞지만 아직 나는 나의 직업을 버리고 싶지 않다.
마음으로 동조하고 지원하고 싶다.
이러는 내가 나도 밉지만 그의 손을 들어주면 내가 직장을 잃는다
학자적 양심이 용납하지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미안하다.......“


아래글은 오래전에 올렸던 글입니다
다시한번 본문으로 올립니다

다소 문구가 거친점 이해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창범 교수의 답변)

http://astro.snu.ac.kr/~cbp/bbs.htm

이  름 :박창범
글종류 :답  변
2003/10/4(토) 15:11


(답변) 그동안 연구결과에 대한 반박논문이 있는가에 대한 답변  

제 연구결과를 반박하는 학술지 논문은 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소재를 가지고 한 연구의 결과는 제시할 수
있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기존에 한 제 연구가 잘못됐다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창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매국식민사학의 O들의 박창범 교수 죽이기)


황당한 이메일을 하나 받아 답변 겸해서 상기와 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려 봅니다

좀 공격적인 문구와 일부 욕설(OO처리합니다) 이해바랍니다(용서를 ~)
자신들의 "무식"과 "무지"를 깨우치지 못하는 현실 답답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매국식민사학의 O들의 박창범 교수 죽이기)


운영자 송준희입니다

저는 은행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기업여신을 오랬동안 취급하여 기업여신 부분에 관심이 많습니다

자 여러분중 공장을 건설하고자 자금을 대출받으려 합니다
누구에게 자문을 고하는 것이 제일 빠를까요

(1) 송준희
(2) 민족사학자
(3) 식민사학자

빗대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랜옛날 임금님들은 측근에 천문학자를 두고 일식 등 하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기원전 102년 1월 20일에 일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면 누가 검증을
할 수있겠습니까 ?

(1) 천문학자
(2) 식민사학자

홈페이지 운영을 두려워 하며 홈페이지 운영을 하여도 질의/응답 내지
자유게시판 달기를 두려워하는 식민사학자들이 천문 검증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한/중/일 3국을 비교해보면
오직 우리나라만 정사에 나오는 천문기록 전체를 검증한 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1925년 반도충부라는 작자가 거짓증언한 논문만 믿고
단한명도 지금가지 삼국사기 천문기록을 검증한 인간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본문 우리역사 신라항목에 장문의 글을 소개하였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은 생략합니다


한가지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서울대 천문학과에서 우수한 두뇌들이 컴퓨터로 정밀 검증한 삼국사기
천문기록 검증 결과에 대한 다른 결과가 있으면 증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박 교수의 연구결과가 틀리다는 자료가 학계를 통하여 공식 발표된다면
그 다음 토론이 가능합니다

아직도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에 대해 악의적 문구를 동원하며
온갖 못된짓을 골라서 하고 있는 식민OOOO의 충실한 "O"들에게
아래와 같이 제발 부탁합니다



(식민OOOO의 O들에게 부탁하는 운영자의 당부)


(1) 첫 번째, 우선 박교수의 저서를 읽어 보길 부탁한다. 이지겨운 인생들아(^.^)


(동아시아 일식도)

1925년 이후 아무도 하지 않은 우리정사에 나오는 천문기록 분석을
처음으로 해놓은 책이다.

"삼국사기가 중국사서를 베껴 믿을 수 없느니" 운운하는 식민강단 O자식들의
개소리가 듣기 싫어 한/중/일 3국 정사에 기록된 모든 일식기록을
한 개씩, 한 개씩 개개건별로 분석하여 밝혀 놓았다

대한민국에는 1925년 아후 이책 하나밖에 없다
그 검증 결과가 틀리다면 "서울대 천문학과/출판부" 명예를 걸고 출판 하지 않았겠지

제발 좀 읽어 보고들 얘기 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다른 연구결과를 제시하라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여기에는 일식뿐만아니라 중/일 어디에서도 기록한바 없는
낮에 금성을 육안으로 관측하는 등
우리민족이 중/일 보다 한단계 앞선 고도의 천문관측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모든 천문기록을 분석해 놓았다

물론 독자기록이다
아직도 중국 기록을 베꼈다고 헛소리 하는 인간들은 식민사학의 "O"들 밖에없다

제발 정신차려라


(2) 박창범 교수 홈페이지 주소 및 연락처를 알려줄테니 직접 물어보라. 연락하면 친절히 자세히 가르쳐 준다


인생이 피곤하니 숨길 것도 많겠지.
박교수는 니들(?)처럼 골방에 쳐박혀 있지않고
물어보면 답하고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한 토론은 언제던지 환영한다

니들끼리 백날 토론하는 것 보다 직접 물어보라고 그렇게 방법을 일러주어도
죽어라고 안돌아가는 컴퓨터에 넣고 돌린다고 다른 결과가 나오더냐

차라리 서울대 천문학과에 가서 계산좀 해달라고 부탁하면 다 들어 준다
쉬운 길을 택해라


(박창범 교수 홈페이지 주소는 다음과 같다)
- http://astro.snu.ac.kr/~cbp/main.htm


(3) 다음은 박창범 교수 이력이다. 니들처럼 식민사학자도 아니고 , 재야사학자도 아닌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국내 서울대 천문학과의 교수다. 니들이 말 잘하는 "비전문가"가 아닌 초신성을 국내최초로 발견한 "천문학 전문가" 이다

(박창범 교수 이력)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졸업
- 미국 프린스턴대학 천체물리학과 박사
- 우주론·외부은하·고천문학 연구
- 현재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


(4) 자 이제 박창범 교수 저서소개다. 간략히 소개한다. 제발 읽어보고 개소리들 그만해라. 다른결과가 나오면 제발 나에게도 알려달라. 부탁이다


(동아시아 일식도)


(한/중/일 삼국 일식실현율 비교) 삼국사기가 제일 높다


한중일 삼국은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일식 관측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관측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는 데
그 기록들의 사실성 여부는 기록된 각각의 일식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인지를 알아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2천 년 이상 전부터 일식을 기록해 온 한국과 중국의 일식 기록들의 실현율(實現率)을 비교해 보자.


우리 나라의 경우


신라는 하대(下代)에 서기 787년부터 911년까지 일식 기록이 10개 남아 있는데,
그 중 9개가 실현되어 실현율이 90%이다.

또 상대(上代)인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56년까지 나오는 일식의 실현율은 84%(16/19)이다.

백제와 고구려 일식 실현율은 각각 77%(20/26)와 73%(8/11)이다.

삼국의 일식기록을 다 합치면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다
(총 66개 중 53개 실현).


반면에
중국 사서에 실린 일식 기록들의 실현율은 『삼국사기』의 것에 못 미친다.


예를 들면
전한과 후한(前漢·後漢),
동진과 서진(東·西晉),
당(唐)의 일식 기록 적중률은 70%(219/312)에 불과하다
(박창범과 라대일 1994).

삼국의 초기 일식 기록들은 실현율이 더욱 높아 중국 왕조가 전한과 후한이었을 때,

즉 신라 내해 6년(201)까지의 일식 기록과,
백제 초고 47년(212)까지,
그리고 고구려 산상 23년(219)까지의
일식 기록 35개 가운데 31개가 실현되어 일식 실현율이 무려 89%나 된다.

같은 시기에
『한서』와『후한서』에 기록된 일식의 실현율이 약 78%이므로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11%나 높은 실현율을 갖는다.


따라서
일식 현상에 관한 한 『삼국사기』는 동아시아의 모든 고대 사서 중에 신뢰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 관측에 근거한 자료이다).

고려 시대의 일식 관련 기록은
서기 1012년에서 1391년까지 『고려사(高麗史)』천문지(天文志)에 134회 나온다.
이 가운데 일식이 실제로 관측되었다는 기록은 116회인데,
이 가운데 85%(99개)가 실현되었다.


이제 일본의 고대 일식 기록의 실현율을 살펴보자.

서기 950년 이전에는 216개의 일식 기록이 있는데,
이 중 35.2%인 76개만이 일본에서 일식을 조금이라도 관측할 수 있는 경우이다.

784년 이전인 야마토(大和)시대와 나라시대에는 실현율이 더욱 낮아
33%(81개 중 27개 실현)에 불과하다.


일본의 초기 국가로 알려진 왜(倭)가 남겼다는 일식 기록은 2/3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어서
추측이나 계산에 의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때 근처인 서기 1550년에서 1650년까지의 기간에도
앞 뒤 시기에 비해 일식 기록은 많이 증가하나 그 실현율은 47%(32/68)로 매우 낮다.

반면에
950년에서 1550년 사이에는 189개 중 137개가 실현되어 실현율이 72.5%로 상대적으로 높다
(박창범 1996).

고대 사서에 기록된 일식이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그 사서의 신뢰도를 가늠하게 해 주는 일차적인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일식 기록의 2/3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들인 야마토 시대와 나라 시대의 일본 사서의 내용은
신뢰하기 매우 어려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한중일의 여러 고대 사서들 중에 일식의 실현도가 가장 높은 『삼국사기』의 내용은
그 신뢰에 있어서 타사서와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한중일 삼국의 고대 일식 기록표(1) >


박창범 교수가 서기전 776년부터 1900년까지 일어난
한중일 3국의 1,443개의 일식 항목을 개개별로 분석해 놓았다.

동양최초의 일이라 하겠다.

일식과 관련된 사서 해석의 문제해결의 좋은 자료가 되길바랍니다

무려 380여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라 일부만 샘플로 전제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바랍니다












(저 서)

- 인간과 우주 (1995)
- 한국의 천문도 (1995)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박창범 저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책 내용중

박교수에게 "고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된 라대일 박사의 죽음을
애도 하는 글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대일 박사와의 인연, 그 뒷이야기)


라대일 박사의 부음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1989년
지도교수인 스타인하트와 함께 '확장된 급팽창이론'을 제안하면서
세계 천체물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 우주의 가속적 팽창에 관한 이 가설은
구스의 '최초의 급팽창이론'에 이어
린데·스타인하트·알브레이트 등의 '새급팽창이론',
린데의 '혼돈 급팽창이론'의 뒤를 잇는
급팽창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영향력 있는 업적이었다.

1993년 귀국한 그는
대덕 천문대를 거쳐 이듬해 세종대에 재직하던 중 암선고를 받았다.

미래에 대한 포부와 의욕이 대단했던 그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반드시 병마가 자신을 비켜 나가리라고 믿었다.

내가 단군조선 시대와 삼국 시대의 천문 기록에 대한 연구와 발표를 하는 동안
라 박사는 수술을 받고 어느정도 회복되어 가는 듯 했다.

1995년 가을 경주에서 열린 한 워크숍은
내가 그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본 자리였다.

그해 겨울 암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받은 그는
고통스러운 회복기와 투병을 반복하다가
이듬해인 1996년 가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별과 우주 속으로 돌아가 편안히 잠들었으리라 믿는다


(완)

< 박창범 / 라대일 >









운영자인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검증은 감히 생각조차도 못할 뿐더러,
일본놈들의 교모한 간계에 속아 근 1세기 동안
자기나라 정사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현실은
OO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독자기록이며 우리민족이 더우수한 천문 관측기록을 남겼음을
동양 3국 사서의 모든 천문기록을 비교분석함으로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오히려 일본의 고대사가 계획적/조직적으로 조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최소한 남에게 비겁한 행동들은 하지말자
뒤집을 수 있다면 뒤집어 달라 ~
그래야 우리의 고대사는 바로 잡힐 수 있다



(삼국시대  천문기록이 밝혀 준 고대 역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식 기록을 추려 내고
신라, 고구려, 백제별로 분류해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관측지를 각각 찾아보았다.

그러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위치가 나왔다.

애초에 삼국의 위치는
익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대로 한반도상에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확인 결과 전연 다른 위치가 튀어나왔다.
신라와 백제의 경우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대륙 동부에 최적 관측지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예측이 이렇게 빗나갈 줄이야! 뭔가 숨어 있겠군!'

단지 내 검증 방법을 한번 확인해 보기 위한 '테스트'에 불과했던 이 계산에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곧바로 일식 기록에 대한 나의 위치 추정 방법을 얼마나 믿을 수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삼국 시대보다도 역사가 더 정확히 알려진 고려 시대의 일식 기록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고려의 최적 일식 관측지마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나온다면
그때는 나의 위치 추정 방법의 신뢰성부터 의심해봐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경우엔 정확히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한·당·양나라와 같은
중국 여러 나라들도 연이어 확인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 나라들이 기록한 일식의 최적 관측지들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각국의 강역과 맞아떨어졌다.


삼국의 위치 또는 《삼국사기》 일식 기록에 대한 의심을 더 이상 파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내게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삼국사기》일식 관측지의 결과를 당장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확고부동한 사실로 상식화되어 있는
한국사의 내용과 상충하는 이 결과를,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일단 더 이상의 판단을 멈추고, 시간을 두고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해 못할 문제라도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유경로 교수와의 만남)


그러던 중
우연히 유경로 선생님과 만난 자리에서 이 결과를 의논하게 되었다.

유 선생님은 한국 천문학계의 1세대로서,
원래는 외부은하 천문학을 연구하시다가
말년에 천문학사 연구에 정진하신 원로 천문학자셨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유 선생님은 논문 몇 편을 내게 건네주셨다.

일본학자 반도충부(飯島忠夫,1926)와
제등국치(薺藤國治,1985)의 논문 등이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우리 《삼국사기》의 일식을 비롯한 여러 천문 현상 기록들을 꾸준히 연구해서
많은 결과를 내놓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후

이 논문들과 서양의 과학사 논문, 국내의 과학사 책들을 보면서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천문기록,
그중에서도 6세기 이전의 기록은 모두 중국 기록을 베꼈거나
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서양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을 완전히 무시한채
《고려사》의 기록부터 비로소 인정하는 추세이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도 3세기경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분위기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의 일식 기록에 대해
한양대 김용운 교수는 서기 2, 3세기부터 실측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한국외대 박성래 교수는
신라와 백제의 경우 빨라도 서기 200년대까지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못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삼국사기》 천문 기록에 대한 이 같은 견해는
일본 천문학자들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
특히 삼국 시대 초기 부분이 조작된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 시기 전체의 역사 기록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삼국사기》가 지닌 "사서"로서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이
왜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가에 대해선 그들의 관련 논문 등을 읽어 보면
언뜻 납득할 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들의 논문을 접한 뒤,
내가 확인한 삼국의 최적 관측지가 왜 중국 대륙으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학자들의 말대로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베낀 것이라면
당연히 그 최적 관측지도 중국 대륙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내 연구에서 계산된 삼국의 일식 관측지들이
지역적으로 서로 매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중국의 일식 기록을 무작정 베꼈다면
관측지가 모두 같게 나와야 하지 않은가 ?

또 중국 것을 베꼈다고 알려진 《삼국사기》의 기록이
오히려 그 '표절 원문'인 중국 사서의 일식 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는 사실에도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의 연구처럼 기록들을 개별적으로 검토하는 방법이 아니라,
삼국이 남긴 일식의 성질을 나라마다 집단적으로 서로 비교해 살펴보면
뭔가 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가을,
나는 다시금 새 출발선에 섰다.

밀쳐 두었던 《삼국사기》에서
모든 천문 현상 기록들을 발췌해 펼쳐 놓고 이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식관측지가 중국대륙으로 나타나는 이유)


기상자료를 추가로 연구하여 관측지를 재확인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신라와 백제의 최적 일식 관측지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중국 대륙 동부에 위치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의문마저 풀자면 앞으로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관련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어떤 시나리오로 구성되든 간에
앞으로 우리 국사는 여기에서 밝힌 "삼국사기"의 자연현상 기록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우리의 옛 책에 나오는 자연현상 기록을
역사학계에서 사료화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놓기 위해 이작업을 한 것이므로
새로운 역사나 사서내용의 유래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역사학자들에게 넘겨드릴 몫이다

나는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까지만을 찾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과학자의 능력이자 역사학에 대한 한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식 기록을 통해 파악한 관측 위치와 삼국의 위치와의 관계에 대해
굳이 나의 입장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한 나라의 역사서에 수록된 일식 관측지가
그 나라의 강역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천체관측과 같은 중요한 일은
그 나라의 수도에서 이뤄지는 것이 가장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된 최적 일식 관측지가
그 나라의 위치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지, 이 경우에는 그 사서에 그러한 사료가 담겨지게 된
특별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처럼 각국이 직접남긴 1차 사서가 아닌,
후대에 여러 사료를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엮어 놓은 역사서에서는
참고된 사료의 불연속성과 이질성이 있을 것이고,
타지역 세력이 유입되면서 가지고 들어온 자료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이
당대에 누군가 "실측"을 해서 남긴 "독자기록"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그기록이 기존의 사관과 현격히 다른 내용이라는 상황 모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삼국사기"의 내용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단국조선 시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연구에서 내가 알아 낼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대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된 모든 천문 현상 기록이다.

여기서 내가 풀고 싶은 의문점 몇 가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 삼국의 강역 문제
- 과학과 문화의 시작과 수준문제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의 초기 내용이 '표절' 또는 '창작'이라고 국내외에 알려진
지금까지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실상 《삼국사기》는 삼국이 직접 남긴 1차 사서가 아니라
고려 시대에 남아있던 여러 국내외 사서를 근거로
고대 기록을 취사, 편집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당대의 원래 기록처럼 아주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취사, 편집 과정에서
사료의 부족,
사료의 선택적인 취입·착오·윤색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러 참고문헌을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엮다 보니
내용의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 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읽는 자의 몫이다.

기록상의 흠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느냐,
그리고 용인하느냐에 따라 사서를 신뢰하는 정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삼국사기》의 경우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시대를 구획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 예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주변국,
즉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처음으로 나오는 시점을 잡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B.C.37년에 건국되었다는 고구려는
중국 문헌에 근거하여 태조 때인 A.D.356년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삼국의 초기 역사가 짧게는 90년에서 길게는 410년까지 잘려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외에도 '말갈'과 같은 후대의 용어가 사용되는 시기,
'오행'과 같이 후대의 중국 사상이나 고전이 삽입되는 시기,
국경이 불분명한 고대 국가로서 주변국과의 접촉이 너무 빈번하다고 생각되는 시기
등이 초기 역사를 의심하게 만드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 중에 가장 호소력을 가진 근거가 바로 천문 현상 기록들의 조작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계산으로 진위를 따져 본 결과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들은 위조되었거나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국사학계 내에서는 서기 500년 이전의, 특히 서기 200년대 이전의 삼국 초기에 대해서는
좀더 새롭고 풍부한 사료가 나올 때까지 연구를 보류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의 초기가 역사적 여백으로 남게 되면,
그보다 더 이전인 삼한 시대와 고조선 시대는 삼국 시대 보다 더 큰 불신과
무관심 속에 방치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는 우리의 고대사 복원에 큰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그 같은 역사적 불신의 한 발단이 천문학적 연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천문학자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여러 천문학자들이
우리 《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을 연구하여 세계에 발표하는 동안
정작 국내에서는 우리의 고대 천문 기록에 대한 과학적 계산과 철저한 분석을 수행하여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일면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천문 기록을 발췌한 사료집마저도 나와 있지 않으니,
자국의 옛 천문 기록을 총정리한 사료집을
이미 오래전에 편찬한 중국과 일본을 생각해 볼 때 부끄러움마저 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천문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기록을 남겨 온 천문의 나라이다.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노력을 기울여 이 귀중한 유산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천문기록을 역사학계가 사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형태로 바꾸어 놓는 일은 천문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좀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들어가기전에 운영자 혼잣말)


우리 천문기록의 우수성은 동양 3국중 최고의 것이다
이것은 1920년 이후 누구도 하지 않은 과학적 검증을 박창범 교수가 한 것이다

베꼈다는 것을 증빙하려면
동양 3국 사서의 천문기록을 전부 비교한후에
자료를 제시하라

그것이 아니라면 다음 기록을 보고 "o소리들"하지 말기 바란다
스스로의 무지/무식을 들어낼 뿐이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

다시 말하지만 독자기록이며 더우수한 천문관측 능력을 가지었다



< 삼국시대의 천문현상 기록 >























(삼국시대 천문기록 연구에 대한 학계의 반응, 그 이후)


삼국시대 천문 기록에 대한 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뒤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중의 하나는
"이 발견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어떻냐"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요즘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다
역시 궁금해할지 모를 분들을 위해 그동안 반응을 덫붙여 두고자 한다

자연과학자들은 논문을 쓰면 으레 그 분야의 다른 학자들에게
논문을 보내 사적인 검증 절차를 거친다

이는
동료학자들의 의견을 먼저 구함으로써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 했을 때
발생 할지도 모를 논문에 대한 시비거리를 미리 걸러내고,
스스로도 자신의 연구 방향과 결과에 대해 보다 강한 확신을
다지기 위해서다

나는 먼저 천문학과의 다는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얼마 뒤 천문학회 학술대회에서 단군조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다음 단국대 윤내현 교수에게 단군조선과 삼국 시대 논문을 보여주었는데,

윤교수는
삼국시대 일식 관측지에 대한 나의 연구 내용중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이 백제의 요동 경략설에 부합함을 지적했다

반면에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또 단군조선 연구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국상고사학보"에 실었는데,
당시 심사를 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는 이 논문이 새로운 역사 접근법을
시도한 점을 뜻있게 평가해 게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뒤 한 재야 사학단체로부터 단군조선 연구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재야단체에서의 강연은 매우 호의적인 반향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단군조선을 확고한 국가로 설정하고 있는 많은 재야사학자들의 입장과
나의 연구 결과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연 말미쯤에 이르러,
단군조선 시대의 일식기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하다가
결국 아직 발표가 안된 삼국 시대의 일식기록 분석 결과까지 잠시 언급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들을 가장 잘볼수 있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대륙 동부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청중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중 김씨성을 가진 노인 한분은
"내 조상이 그럼 뙤놈이라는 말이요?"라고 항의하여 나를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오재성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얼마 전 재야 사학단체 모임에서 강연을 들은 한 사람으로부터
내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역시 재야사학자 중 한사람이었는데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그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텁수룩한 외모로 전형적인 농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심취해 생업을 버리고 인생을 역사 연구에 바쳐온
감동적인 사람이었다
역사를 대하는 그의 정열과 애정의 깊이는 놀라웠다
나는 역사가 이렇듯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가져운 연구의 결과였다
그 역시 나름의 방법을 통해 신라와 백제의 강역을 추정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끌어낸 두 나라의 강역이 나의 최적 일식 관측지와 매우 비슷했다

그는 삼국사기의
지명, 교역품, 인물 등을 길잡이 삼아 연구를 했다고 했다

이는 나의 연구배경과 너무 다른 것이라
그의 연구결과를 검증할 수 없었지만
어쨌던 그 내용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삼국시대 천문기록에 대한 연구 또한 학과 교수들의 검토를 거친뒤
천문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과학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도 구두 발표를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학술진흥재단에 건의해서 우리나라 학문 분류에 고천문학이란 분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또 몇몇 천문학자들은 고천문학 연구를 시작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전공한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태돈 교수와 송기호 교수가 보여준
학문적 격려와 지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노태돈 교수는 내 연구가 과학적 접근이란 점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한국과학사학회지"에 투고를 권한 것도 그였다

한편으론 현재 고대사학계에서 이같은 연구 결과를 수용하기에는
많은 상충점이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송기호 교수 엮시 같은 의견이었다

또한 송교수는 나의 연구내용중
상대 신라의 최적 일식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라는 사실 정도가

지금까지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의 전부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결론적으로
고대사 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나의 연구방법은 신선하고 기대되는 바가 적지 않으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상충되는 점이 많아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연구 결과도 다른 연구자에 의해 재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후속 연구를 통해 나의 분석 결과가 설명될 수 있는 내용으로
고대사 일부가 재구성되거나 "삼국사기"의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천문역사학, 천문고고학, 고천문학과 같은 분야에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역사와 관련된 이 논문을 쓰려고 할때
처음에는 이를 국제 학술지에 기고할 생각이었다
국내 학술지 어디에 기고해야 할지 망설여져서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국내학술지에 싣기로 결정했다
전문가의 연구란 그 학문과 관련된 전문학계에서
먼저 소화, 검증된 뒤에 일반인에게 알려지는 것이 올바른 단계라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국사에 대한 연구결과는 누구보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알 권리가 있고,
여기에서 우선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내학계에 먼저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 논문들을 발표한 지도 여러해가 되었디
이때의 나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이 었을까?

한편 이 연구를 하면서 고대 사서에 실린 천문현상 기록들을 하나씩 재연해 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즐거움 이었다

수천년 전에 선조가 남긴 기록과 나의 계산이 꼭 들어 맞을 때,
그리고 켬퓨터 화면을 통해서나마 당시의 하늘을 바라볼때면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할때 꼭꼭 숨겨져 늘 찾지 못했던
보물을 이제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머나먼 시간을 뛰어넘어 옛사람과 한곳에 나란히 앉아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믓해지기도 했다

고천문학 속에 펼쳐진 하늘은 이렇듯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따스한 세계였다

요즘은 아주 먼 엣날까지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여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나와 있다

여러분도 직접 옛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밤하늘을 재연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빛나는 별등 아래 서 있었을 고대인들의 모습도 상상해 보기를 바란다



(참고지도 : "가라" 추청지역)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그릇된 이유)


이쯤되면 일본 학자들이 그동안 "삼국사기"의 실측 기록들을
중국의 것을 베끼거나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해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한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경우 일식을 포함한 천문 현상기록들이 대부분
서기 3세기 이전과 8세기 이후 양분되어 있어
그 시대별 분포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시대의 천문 기록은 가공의 신라초기 역사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꾸며 넣은 장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둘째

삼국의 일부 천문 기록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과 표현이 같은데다
그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의 기록을 무작정 베끼다 보니 실제가 아닌 일까지 옮겨 적게 된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삼국사기" 천문기록에서 보이는 특이점을 이렇게 해석해야 할까?

"삼국사기"가 쓰여질 당시 신라 1,000년의 역사를 충실하게 기술한
참고 사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논리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삼국사기"를 새로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나 고구려, 백제의 역사는 여러 사서로 나뉘어져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고
역사 변천에 따라 사서 내용의 질이 변하고 양이 빈약해진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연표에는
이같은 고대 사료의 부족문제에 대해 한탄하는 글이 남아 있다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인종에게 올린 표에서

"우리 나라의 옛기록인 고기에 많은 사적이 빠지고 없어졌으며,
중국의 사서들에는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리지 않았다"
고 통탄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기록은
"연대가 구원하고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고기, 화랑세기, 사기, 한서, 후한서, 북사, 양서, 당서, 신당서, 수서, 책부원구
풍속통, 통전, 사이술, 고금군국지 등의 여러 국내외 사서들이 인용되고
비교된 점을 보면,

"삼국사기" 편찬자에 사용된 참고문헌 내용의 분량과 질이 시대에 따라
일관적일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천문현상 기록수가 시대별로 크게 변하는 까닭도 사료의 변동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천문 현상 기록중 일부가 중국측의 기록과 같다는 사실은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베껴 원래 없던 기록을 보충한 증거라고 볼 수 없다

편찬자가 에로부터 전해 오는 삼국의 기록을 여러 참고 사서와 비교하다가
동일한 기록이 있으면 참고 사서의 표현을 빌어 고쳐 썼을 수는 있다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이 천문기록에서 보인다

예를 들어
중국 사서에 없는 혜성 기록의 경우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난 위치가
거의 팔방위로 "삼국사기"에 표현되어 있는데

중국 사서에 함께 나타나는 기록에서는 혜성의 위치가 대부분
중국식 별자리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참고 사서와 옛기록을 비교하다가
동시 기록이 없는 혜성기록은 그대로 두고

중국측 기록이 있는 경우에는 혜성의 위치를 팔방위 대신
보다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별자리 이름으로 표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공동기록은 이와 같이 동시에 관측하여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중국사서에 가끔 쓰여 있는 대로 중국이 주변국의 기록을 전해 들어
적은 것일수도 있다


일식의 경우 당시의 부정확한 일식 계산법에 근거하다 보니
중국과 삼국이 함께 실수를 범해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을 일어 났다고
썼을 수도 있다

일식을 빠트리지 않고 관측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일은
당시 천문학자들에겐
목숨과 직결된 중대 임무였기 때문에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일식도
예상만으로 관측했다고 보고 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또 일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까지도 한중일 사서에 적잖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를
단지 베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 할 수는 없다

어려운 대학수학 문제를 똑같이 틀리게 푼
두 초등학생의 답안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무작정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베꼈다고 단정 할 수 있을까?


엄격히 말하자면 일식기록에 관한 기존의 일본 고천문학자들의 연구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대부분 같은날 중국 사서에도 나온다는 단순 비교와 신
라의 일식기록 분포도가 "이상하다"는 심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수행된 일식 계산 결과는
사실상 일본 학자들이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별반 참조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사서 비교를 통해 얻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이지
"삼국사기"일식 기록이 중국 기록의 차용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검증한 과학적 결과가 아니다

과학이 학문으로서 공신력을 지니는 까닭은
주어진 자료에 대해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분석을 통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달과 행성의 근접 현상 관측 기록에도 그랬지만,
일본 학자들은 미리 주관적 결론을 세워 놓고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천문 기록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분석만 하거나
비과학적 논리를 앞세워 결론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혐의가 짙다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었다)


어느 나라가 일련의 일식 기록들을 남겼을 때
이 기록으로부터 어떻게 최적 관측지를 찾을 수 있는가?

일식이 일어나면 지구에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떤 곳에는
달의 온 그림자가 드리워져 해가 달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다.

그 주변 지역에는
달의 반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해의 일부만이 달에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일어난다.

달이 해에서 좀더 비껴 지나가는 경우에는 부분일식만 일어난다.
어떤 경우이든 어느 한 일식은 지구상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어떤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서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동쪽에서는 볼수 없다

또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는 볼 수 있지만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일식도 있다.

만약 어느 나라가 한반도에서 꾸준히 일식을 관측했다고 하자.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반도이다.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중에는
주변국에서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일식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적 일식 관측지는 바로 이러한 일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찾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삼국이 각기 일식을 관측한 지점은 어디였을까?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삼국이 정말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는지,
또 관측을 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일식 관측지 추정 방법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
고려와 한·당·양나라가 남긴 일식 기록들에 대해 최적 관측지들을 추적하고
이를 각 나라의 강역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가 실제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강역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삼국의 최적 일식 관측지를 찾아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의 지역이었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 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매우 심상치 않은 결과이다.

중국의 기록을 베꼈다면
당시 중국 나라들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와
삼국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가 평균적으로 모두 같은 위치로 나와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관측지가 나라마다 매우 다른 위도상으로 각각 떨어져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 등이

고도의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중국 일식 기록을 선별한 다음,

북위도로 지나가는 일식은 <고구려본기>에,
저위도로 지나가는 것은 <신라본기>에,
그 사이의 것은 <백제본기>에 나누어서 삽입하는 등
주도면밀한 편집을 했을리 만무하다.

이 정도의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천체 역학적 지식과
첨단의 컴퓨터를 이용한 방대한 수치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라고 결론지을 수있다.

이를 확률적 계산으로 증명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 사서의일식 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번 해 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의 일식 기록은
중국 기록의 모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실측했던 기록인 것이다.


한편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서 일식 관측을 했음에도
'우연히' 최적 관측지의 경도가 모두 중국 대륙으로 나올 확률도 사실상 0이다.
(기존 발표 논문 참조).


이들의 일식 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지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인 것이다.

요컨대
삼국의 일식 관측지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야학자들과 "협잡운운"마라 박교수의 연구결과는 대륙삼국을 밝히는데 일부분일 뿐이다. 그는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정사의 기록을 분석해 놓았을 뿐이다.


(사서학, 천문학, 기상학에서 밝혀진 대륙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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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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