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 라마나는 자기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되 가능한 한 오래 그 느낌을 유지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딴 생각에 의해 주의가 분산되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마 '나'라는 생각의 자각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했는데―예컨대 탐구자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이 나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육체와 마음의 모든 활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나'를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생각 또는 지각의 형태를 띤 정신적 행위가 된다.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나'라는 생각은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나'라는 느낌이 되고, 이 느낌이 다른 생각 또는 대상들과 연결되어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그칠 때, 그것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개인성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존재의 체험만이 남게 된다. 이 체험이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나타나지만,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점점 더 쉽게 이루어지고 오래 유지된다. 자기탐구가 이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의 개인적인 노력이 불가능한 애씀없이 자연스러운 존재의 자각이 있게 되며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노력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노력하던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나'라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진아 깨달음은 아니지만 수행의 최고 단계이다. 이러한 존재의 상태를 계속 체험하게 되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던 원습들이 점차 약화되고 파괴되는데, 그것들의 힘이 충분히 약화되고 나면, 진아의 힘이 남아 있는 습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림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최종적인 확고한 진아 깨달음의 상태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에 대한 자기주시 또는 자각의 이 수행법은, 마음을 제어하는 보통의 억압적인 수행법들을 능가하는 유연한 기법이다. 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행법도 아니고 생각을 억누르는 것을 목표하지도 않으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자각하며 깨어있는 것이다. '자기 아닌 것들'로부터 주의와 관심을 거두어들여 마음의 근원에 머무르면서, '참으로 자기인 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자기탐구의 방법이자 목표이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부터 생각하는 자기에게로 주의를 되돌리는 형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나'라는 느낌의 자각이 일단 확고하게 자리잡고 나면 더 이상의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적이다. 이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존재의 과정이며, 존재하려고 애쓰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애씀없는 존재의 과정이다.


본래 자기인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노력이 필요 없으니, 존재함은 항상 현존하며, 항상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아닌 것[즉, 육체와 마음]으로 존재하려는 척하는 것은, 비록 거의 언제나 무의식 수준에서이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정신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기탐구의 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노력이 오히려 존재의 체험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노력을 그쳐야 그 체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아는 무엇을 행위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직 존재함으로써 발견된다.


자기탐구를 명상 수행과 같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깨어있는 동안 내내,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나 계속되어야 한다. 슈리 라마나는 일과 자기탐구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다고 보았으며, 조금만 해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초보자들의 경우에는 일정한 시간대에 정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장시간의 좌선 정진은 결코 권하지 않았으며, 그의 헌신자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활동을 버리고 명상 생활에만 전념하고 싶어했을 때 항상 찬성하지 않는 뜻을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