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육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그다지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대는 일체의 몸이기도 하고 심장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하며, 그 훨씬 이상이기도 합니다. '내가 있다'는 느낌 속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어디에 잘못 두었거나 잊어버린 물건을 그대는 어떻게 찾습니까? 그것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다가 문득 기억해 내지요. 존재의 느낌, '내가 있다'는 느낌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자신에게 묻거나, 아니면 그저 그것을 고요히 지켜보십시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내가 있다' 안에 머무르면 그대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애쓰고 또 애쓰는 것이 그대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어쨌든 '내가 있다'는 느낌은 항상 그대에게 있지만, 단지 그대가 거기에 육신, 느낌(감정), 생각, 관념, 소유물 등 온갖 것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자기동일시물이 그대를 오도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그대의 본래 모습과 다른 어떤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대가 뭐가 아닌지를 알면 충분합니다. 그대가 무엇인지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앎이란 것이―지각한 것이든, 개념으로 인식한 것이든―이미 알려진 것을 가지고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 자기 앎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무엇이다라는 것은, 그것을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부정해 버리지 않는 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즉,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저것이 아니다'라는. '이것이 나다'라고 말해봤자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허튼 소리일 뿐입니다. 그대가 '이것'이나 '저것'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일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그대는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지각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대가 없이는 어떤 지각이나 생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가슴이 느끼고, 마음이 생각하고, 몸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지각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는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대 없이 지각이나 경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