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실험을 해보라. 하루 종일 기억날 때마다 숨을 한껏 내쉬고 결코 들이쉬지 마라. 들이쉬는 숨은 몸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대는 한껏 내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깊은 평화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평화이며 침묵이기 때문이다. 내쉬는데만 집중하면 그대는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계속 숨을 들이쉬면 더 단단한 에고를 느끼고, 숨을 계속 내쉬면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날숨에 더 집중하라. 하루 종일 기억날 때마다 한껏 숨을 내쉬어라. 들이쉬지 마라. 솜을 들이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이렇게 숨을 내쉬는데 중점을 두면 이 방편을 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대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방편은 별로 두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맛을 보아야만 준비를 할 수 있다. 숨을 한껏 내쉬라. 그러면 죽음을 맛볼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죽음은 아름답다. 죽음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며 평온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을 겁내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자체때문이 아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주친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한단 말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려움은 다른데에서 기인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온 적이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긴다.
"나는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죽음이 다가오면 어떡하지?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을 환영할 것이다. 아무 두려움도 없다.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 자체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이 방편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그 뿌리깊은 두려움을 자각해야 한다. 그 두려움을 던져버려야만 이 방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쉬는 숨에 더 관심을 기울여라. 이것이 두려움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그대는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고 내면의 침묵이 창조될 것이다.


다른 실험을 하면 이 느낌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하루에 15분씩 숨을 한껏 내쉬어라. 의자나 땅바닥에 앉아 숨을 깊게 내뿜어라. 그리고 숨이 나가는 동안 눈을 감아라. 공기가 나갈 때 그대는 안으로 들어온다. 그 다음에 몸이 숨을 들이쉬도록 허용하라. 그리고 공기가 들어오면 그대는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간다. 그대와 숨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공기가 나가면 그대는 들어오고, 공기가 들어오면 그대는 나간다.

숨을 내쉬면 내면에 공간이 만들어진다. 호흡은 삶이기 때문이다. 숨을 깊게 내뿜으면 그대는 텅빈다. 삶이 나가는 것이다. 잠시동안 그대는 죽어있다. 그 죽음의 침묵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가라. 공기가 밖으로 나가면 그대는 눈을 감고 안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이 실험을 게속하라. 그러면 그대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된다. 준비뿐만이 아니라 죽음을 환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제 죽음은 깊고 편안한 휴식이다. (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