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잘 살고 못살며, 귀하고 천하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괴롭고 즐거우며 좋고 나쁘며, 선하고 악하며, 옳고 그르며,
크고 작으며, 많고 적음 등 일체의 차별상(差別相)이
모두 분별심에 의해서 생긴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道로써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 가지로 평등한 것으로 서로가 다른 것이 아니며,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 생김으로 해서
서로가 다르게 차별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장자가 이르기를 `道에 통하면 다 하나가 된다.(道通爲一)'고 한 것이다.

道를 행하는 요체(要體)는
마음이 생(生)한 즉 곧 마음을 멸(滅)하며,
생각이 일어난 즉 생각을 절(絶;끊다)하며,
相에 착(着;집착)한 즉 곧 파(破;없애다)하여야 한다.

그래서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하고 담적(湛寂)하여,
비고 비어서 그윽하고 깊으며,
일물(一物)도 있게 하지 않도록 一切相에 집착하지 말라.

一切念도 動하지 말며,
一切心도 일으키지 말라.

일체처(一切處)에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비우고 비워서 텅 빈 가운데
스스로 진공(眞空)을 얻어서
묘유(妙有)의 대자재(大自在)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없으므로 모양(相)이 없고,
또 모양이 없으므로 마음도 없으리라.

안으로는 마음이 없으니
안과 밖이 반연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도 모양이 없으니
밖이 안과 반연하지 아니한다.

안과 밖이 서로 반연하지 아니하므로
相도 없고 생각도 끊어져서 마음이 생기지도 않으니
마음이 멸(滅)하면 일체의 法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마음 하나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 하나를 끊여서 일체 法을 끊는 방법이다.

만상(萬相)은 없애기 쉬우나
아상(我相)은 없애기 어렵고,
만집(挽執)은 없애기 쉬우나
아집(我執)은 없애기 어렵다.

진실로 道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상(我相)과 아념(我念)과 아집(我執)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자에게는 我相을 끊고
극기(克己)하여 복례(復禮)하므로서
道에 돌아가는 귀도(歸道)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당위적인 문제인 것이다.
(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