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명  (生 命)

1. 생명에 대한 순순한 사고방식

"대사(大師)들의 생활"은 생명 그 자체이고, 길(道)이며, 이 생명의 길을 대사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들은 생명을 실상(實相) 그대로 살고 있다. 생명이란 유일 원리의 활동인데, 그 본원(神)에서 나눌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 대사들의 생에 대한 태도이다. 대사들은 이 원리에 충실히 순종하여 생명을 살고 있고, 이와 같이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원리에 충실히 따라 살도록 몸으로써, 수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대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은 생존의 한 이론이 아니고 현실의 사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사실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생활 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순일한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그러한 태도는 또한 사는 방법에 대한 순일한 사고방식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생명이라 함은 인간 각 개인을 통하여 표현되는 神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각 개인은 생명이 나타나는 최선의 경로이라고 대사들은 말하고 있다. 이같이 하여 생명은 개개의 인간을 통하여 기타의 생명보다도 한층 더 정선된 완전한 형태로써 표현된 것이다.

2. 생명의 활동은 자기 나름.

대사들은 만물 만상을 통하여 유일의 대 생명이 방사하고 있는 것을 철견(徹見)하고 있다. 사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은 이 유일의 대 생명의 정수(精髓) 그 자체이다. (인간만이) 생명 표현의 수단인 형태(신체)가 출생한때에 비로소 그 생명이 시작하였다고 결정하고 있지만, 실제에는 형태 이전에 생명은 이미 실존하고 있어 그 형태까지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형(形)의 출현은 형의 시작이지 생명의 시작은 아니다. 생명은 형태의 출현 이전에 실존하여 왔고 금후도 항상 실존하여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들이 어떤 특정의 생명을 가려내고(選出) 혹은 어떤 특정의 방법으로 생명을 헤아려 낸다면(測出), 우리는 거기에 극상(極上)의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도록 할 수 있다. 생명 자체는 중단하는 일도 없고, 제한도 없이 자유 자제로 어디든지 흘러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생명력을 가려내서, 말하자면 타락한 방법까지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리하면 그 생명은 그 본령(本領)을 최대한으로 혹은 최대의 가능력(可能力)을 발휘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을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본인 또는 그룹의 죄이지 생명 자체의 죄는 결코 아니다. 생명은 그 본질을 발휘시키면 대원리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둘려보고 전체적인 활동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생명의 모든 속성을 내 속에 완전히 관류시키면 우리의 생활은 자연히 생명 본래의 이 같은 상태(속성 활동)의 완전한 표현과 발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자기를 한정 말라.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체는 호흡하는, 산 자연체로 되어 생명을 그 최대한도까지 표현하게 된다. 그것이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인간이 부과하고 있는 제약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이것저것 제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 길은 하나 있을 뿐이다. 즉 생명을 최대한도로 표현하는 일이다.        
    
생명은 보편적이므로 어디서든지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나 있고 인간의 마음에 이 보편적 생명과의 분담감만 없어진다면 인간은 이 생명의 동작 중에 더 충분히 들어가서 그 목적과 더욱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잡념, 망상은 인간의 마음에만 일어난다. 생명과 마음은 뗄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으므로 생명을 완전히 파악, 실현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펴서. 생명의 본래상(相)을 먼저보고 살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마음이 반응하기 때문에 다만, 그 집착 때문에 이 일체의 충만한 생명에서 떠나 버리는 것이다.

4.  수 명 (壽命)

인도 사람이 수명을 70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년령이 인간의 최대업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70세까지 되면 완숙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참뜻을 최대한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 인간은 이 완숙기간의 5배는 장수할 수 있다고 대사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있다.

5. 수명을 한정하지 말라.

그러나 인간은 이 같은 시간의 길이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시간은 인간을 한정하는 아무 것도 아니다. 70세까지도 살았다면 동시에 전 생명, 즉 생명의 모든 상태를 다 맛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 생명을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5배라는 것도 결코 한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소망한다면 5천배 라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70세가 되면 영적 방향을 따라 사물을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향은 40세부터 움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6. 지금은 곧 영원

예수가 "살고 있으면서 너희는 죽음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한 것은 인간은 언제나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살고 있으면서 그 가운데 죽음의 상태가 있는 것을 보시고 놀랜 느낌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그 생명을 본래 있는 그대로 살고 본래의 상(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좋은 것이지, 그것을 년 수나 물질적 표준으로 계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 진리를 인정하기만 하면 지금 여기 있어서 구원의 생명인 것이다. 생명은 무슨 저편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실로 이 순간에 여기 실제하고 그 속에 사람은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죽었고, 미래는 구원의 지금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무량수(數)전체가 실로 이 순간에 활동하고 있고 누구나 이 생명수를 자유로 마실 수 있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노력조차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에 살고 있는 이상 이미 구원의 생명 중에 있는 까닭이다. 과거를 잊어버려라. 내 자신을 미래에 투입하려는 시도도 그만 두라. 당신은 "지금" 이미 구원(久遠)속에 있는 것이다.

통설(通說)에 의하면 대사들은 대개 37세 라는 청춘기에 대오철저(大悟徹底=道通)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같은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있다면 각 사람이 부과한 것이다. 산크릿트에서의 37은 영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37내지 7로 1옥타-브가 된다. 몇 회든지 되풀이 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연령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보편생명 내지 그 참 영역 표현의 개인 의식, 확대를 말하는 것이다.

7. 연령의 의미

인간에게 찾아오는 깨달음은 년 수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서 성숙하고 그와 동시에 그와 동시에 본인이 지금까지 일반 인류에서 영향을 받아온 여러 사고 방식 중 많은 것이 이 영혼의 성숙에 의하여 무로 돌아간다. "즉, 그와 같은 사고방식이 잘못임을 알고 이것을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부풀어오르는 꽃봉오리가 지금까지 싸고 있던 받침 잎사귀들을 헤치고 나오듯 성장 확대하여 가는 의식은 허망 관념의 잎사귀들을 제하여 버리고 내부의 본래 상(相)이 나오는 것이다. 늙은 사람이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은 다시 새롭게 유아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인간 계층의 생각 즉, 물질 세계에 접촉하므로 생긴 상념만이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의 생명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비상히 방해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 생명이나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자기에 대하여 앞서와 같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은 생명의 전체 모습이 나타내는 생활이 방해되는 것이다. 인간의 사는 일이 참으로 기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잘못된 생각을 하기 전(즉 유아기)과, 때로는 그 후(노년기)뿐이다. 천재라 함은 이 그릇된 생각을 하는 시기에서 어는 정도 벗어난 사람 즉, 자기가 정한 코스를 걸으며 세속의 한정사상의 방해를 물리칠 수 있는 강한 용기와 담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노경에 들어가면, 전보다 영적 생활을 보내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거짓이 마치 태엽이 풀려져서 그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말한바 그릇된 생각이며 압박 받은 기간 중에도 일관하여 이 같은 용기를 계속 발휘한다면 활력은 쇠퇴케 하는 일도 없게 되고,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연수가 언제까지나 신장되는 것이다.  

8. 생명은 무한

우리나라(미국) 과학자들은 인간의 육체가 70 년 이상 더 늘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포는 7년마다 완전히 새로워진다고 하여도 생명에 어떤 한정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년 수가 아닌 주기(週期)로 움직이기 때문에 주기는 한정할 수는 없다. 주기에는 본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자기 완결의 영원한 과정이며, 주기로 나타내고 있는 자체 중에 진행하고 있는 영원한 갱신 과정(更新過程)이다. 생명은 7로 끝나지 않는다. 아니 생명에는 끝이 없다. 생명은 영원하다. 무릇 존재한 것으로 생명을 가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혹성(惑星)도 또 모두 살고 있고 모든 만물(萬物)에는 생명이 있고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

인간의 연령은 소위 수명이라는 년 수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체는 영구히 자기 자신을 갱신하고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나 조직도 자연의 과정을 지나 부단히 새로워진다. 신체가 연령에 따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어떤 마음의 틀(型) 즉, 틀에 대한 사고방식 때문이며, 이 마음가짐(型)에 따라 세포와 조직의 축소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진리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부단히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게 되면 신체의 갱신과정의 틀도 좋게되고, 그 결과 신체는 다시 완전하고 활기에 충만하게 된다.

9. 시각(時刻)과 생명은 관계가 없다.

우리들이 생명을 충실하게 무한 또는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면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들 자신의 글(書)이 되고, 스승이 되는 것이다. 또 신체의 전 세포가 7년마다 갱신되는 것을 잘 파악한다면 생명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의 과정이 전개함에 따라 자기의 마음도 항상 갱신된다면 생명도 또한 주기로부터 주기에 연속하여 계속 활동하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나무가 늙던지 젊던지 꽃봉오리는 항상 젊지 않는가. 즉 꽃봉오리는 그 자신 속에 완성한 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측에서 연수(年收)라는 제한을 붙이지 않는 한 나무 자체가 노화(老化)하는 일은 없다.

무릇 어떤 것이든지 노화라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화라는 것은 인간이 그런 관념을 붙이는 까닭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할 권능을 받고 있다고 성서는 말하였다. 생명을 연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계산은 버려야 한다. 생명은 다만 생명에 의해서만 계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구원(久遠) 상재(常在) 무량한 것이다. 생명은 우주라 불리 우는 전 조직의 생명활동, 즉 神이다. 인간은 자기의 편리를 위하여 시간을 정하고 시간에 한정 받는 형태로 되어 있으나, 이 같은 금을 긋는 방법으로는 결코 생명이나 시간 그것을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 인간의 가능성 속에 표면에 나타난 것은 다르다.

인간은 생명의 글(書)인 神의 율법의 구체화이다. 생명의 치통원리가 그의 신체 내부의 각부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상에 있는 인간의 그 생존기간은 그가 참나(神我)를 발견하고 외부에 나타내고 가는 길의 행정이다. 자기의 본성을 전개하는 것이 자기의 실존의 비밀을 배우는 일이다. 인간은 직접 나 자신을 연구하고 내 자신의 내적 본질의 가장 깊은 속의 간절한 염원이 무엇인지 알고, 그 나타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10. 장벽은 환상

아마 이 표면에 나타난 것만이 죽음을 알게 하는 유일의 면(面)이며 유일의 상태일 것이다.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참 사람은(眞人)은 시간에 대하여 어떠한 한정도 하지 않는다. 속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두는 일 즉,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시간을 여러 가지로 새기기 때문에 죽을 자가 되는 것이다. 즉 신체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참 상태(實相)와의 사이에 큰 가정(假定)의 세계에 큰 장벽을 쌓아 올려 버리고, 또 그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습관이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과학자는 생명은 불가지(知)요, 해결불능 이라고 말하여 왔다. 장벽을 세운 이상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죄는 죽음의 원인"으로 되어 있다. 죄란 생명의 목적에 조화되지 않는 모든 상념과 감정을 말한다. 이것들이 신체를 통하여 외부에 나타내려는 생명을 방해하고 있다. 이 방해를 제거하는 것이 즉, 치료방법이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신체의 활력을 빼앗고 드디어는 신체와 의식을 분별하는 죽음을 가져오도록 마음을 항구화하지 말고 허망한 마음을 사멸시켜야 한다. 지나간 일을 잊고 앞으로 전진하라.  (계속)
                                    
                                             초인생활 下/선경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