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명 (生 命) 2

11. 대사는 봉사자

대사들의 일생은 세간의 소위 영리(營利)로 보내지 않는다. 그 같은 단계는 벌써 옛날에 통과하였고, 그 생활은 다만 봉사에 있을 뿐 대부분의 대사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물질적 방법으로 물질적 일에 원조하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우리는 대사들이 그 자신을 위하여 누구에게서나 무엇을 받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오히려 대사들이 여러 종류의 식료, 의류, 물품 등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보아 왔다. 실로 대사들은 봉사자이다. 대사인 이상 그들은 세상 위에 있으며 세상은 그에게 무엇도 주지 못한다. 대사들이 도리어 세상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2. 의식이 족하고 진리를 안다

이 봉사를 하는데 있어서 대사들은 특별히 봉사의 대상이 될 사람들을 찾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사람들도 반드시 대사들을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대사들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에 일상생활에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상념과 상념의 전능에 의한 원조를 하지만 보통 일반의 태도로도 원조를 한다. 전 세계에 대하여 전 세계의 본래의 완전상태의 상념도 방사한다. 물론 한 개인이 도움을 요구하는 경우는 언제나 즉시 도움을 받도록 되어 있다.

개인뿐 아니라 큰 집단도 원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전 세계에 대하여 확실히 영파(靈波)를 방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성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방의 상태를 치유(治癒)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더욱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많은 경우 식료나 의류 등 생필품을 주면 이해가 빠르다고 하였다.        

13. 참 도움은 안에서부터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대사들은 외부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대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때 상태는 대사들의 도움에 의하여 거의 즉시 좋게는 된다. 그러나 그 받는 원조는 그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들이 하고 있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대사들은 외부에 돌면서 설교를 하거나 개종(改宗)을 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만 대중사이를 다니면서 대사를 눈치채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어떤 자는 원조를, 어떤 자는 병 치료를, 혹 어떤 자는 식물을, 의복을, 주택을 구하여 그것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지 대사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자신에게 보여준다.      

대중이 받는 것을 실로 대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들 자신이 대사의 지도에 따라 자기의 사고방식을 고치고, 바르게 된 자기의 사고방식을 통하여서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누구 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저들 자신이 가지고 있어 그들에게 소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조를 얻으려면 반드시 우리는 외부에 호소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14. 봉사는 대사에의 길(道).

"종은 고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병을 고치는 것을 돈벌이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봉사하는 자는 더 높은 생명의 가치가 있다. 즉 종이 아니고 대사가 되는데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대사는 가장 큰 종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 생애는 봉사에 바치는 까닭이다. 봉사만이 그들의 일터이며, 그것이 대사임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생명은 진보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득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득은 우리들의 진보에 따라 생기는 것이며, 그 진보는 생명의 종류와 질에 따라 결정된다. 표현이라 하여도 자기의 제한된 생각을 항상 투영하는 것은 아니며 자기의 성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충동에 충실히 충동하여 사는 생활이 아니면 안 된다. 소위 "필요"라든지 "편리"라는 것에 타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비 곡절을 직감하는 내부의 힘에 거슬리게 된다.  

15. 대사들의 식사.

대사들은 아주 소량의 식사를 취할 뿐이다. 하루에 쌀 세 알밖에 먹지 않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대사들은 필요하다면 프라나를 섭취하고 있다. 먹는 식물을 철저하게 씹으므로 이 세 알의 쌀을 하루 종일 씹다가 끝날 때에는 적어도 24시간은 육체가 지속 할 수 있을 만큼 프라나를 섭취한다. 대사들은 인간이 계산할 만큼 시간적으로 일하지 아니 하므로, 일정한 식사시간이라 할 것은 없다. 먹고 싶으면 먹고 우리가 잘 하듯이 "오 벌써 식사시간이라"는 기대는 가지는 표정을 보지 못하였다. 대사들은 수백일 지라도 전혀 식사 는 하지 않고 지내는 일도 있다.
          
16. 수 면 (睡眠)

우리가 아는 바로는 대사들의 수면은 극히 적고 하루에 2시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 2시간도 의식은 바로 활동하고 있다. 자기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자기가 자신의 우주에너지에서 소외하여 자기의 의식을 위축시키는 일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수면을 취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사회와 서양의 생활 방식으로는 모처럼의 수면도, 다소간 소위 육체의 중독에 의하여, 생겨난 상태인 것이다. 중독은 어느 정도 신체의 재생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수면이 수면의 참된 상태가 아니라 중독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는 자여 눈을 뜨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같은 혼수상태에서 일어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일어난 때에 사람은 그 사로잡혀 있던 힘에서 해탈된 것이다.        

17 적게 먹는 것이 유익하다.

서양에서는 인체에 필요로 하는 식료의 적어도 10배를 필요 없이 섭취하고,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기 위하여 상당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 불필요하게 섭취하는 과잉음식의 10분의9를 처리하기 위하여 쓰는 에너지는 육체를 성장시키는데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서구세계는 건강에 필요한 식사 량을 적어도 10배나 더 섭취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생명의 에너지를 직접 에-텔에서 취한다면 그 에너지는 식료의 동화에 사용 대는 대신 항상 육체에 직접 사용되어 육체의 각 기관에 에너지가 직접 전달되어 각 기관은 갱신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체의 발육에 필요한 소요분만만큼 식료만 있으면 족하다. 그 이상은 육체 활동에 과중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더욱더 자기의 실존의 찬조 원리 중에서 활동하고 있는 질료(substance)를 먹고살도록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참 영양을 알게된다. 또 식료가 육체를 만드는 재료를 제공하는 것같이, 수면은 낮 동안 잘못된 생활을 하는데서 생긴 잔재 에너지를 소멸한다.

18. 생명에 직참(直參)하라

생명(實相)과 그 기능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어떤 형식으로든지 대사의 곁에 있고 혹은 대사들과 접촉하는 일은 아무 필요도 없다. 생명은 지구상 어떤 곳에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어디에나 존재하여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를 그쪽에 돌리고 생명의 표현 수단에 불과한 형태에서 마음을 개방한다면 누구나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

19. 내 생명은 神의 생명

나의 사는 생명, 생활은 모두 이것이 神의 생명, 생활이라는 순수한 태도를 가지고 생명활동을 높인다면 바로 대사들과 한께 사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대사들의 생활이라 해도 거기 아무 특별 이상한 일은 없는 것이다. 보통 대사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특수한 이상현상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참 생명 그대로 산다면 참 생명의 전 기능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그 자신을 외부에 나타내어 구상화하려는 내부 힘에 한 행정(行程)이다. 그것은 일체의 공간과 일체의 형체 있는 것에 생기를 주는 우주의 활동원리인 것이다.        

20. 마음가짐

대사들은 우리의 일상 행동에 대하여 어떤 규칙을 정하고, 혹은 우리의 정신과 신체를 위하여 일상 실습할만한 규정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물론 그 같은 방법을 가르치어 사람들을 인도하여 수행자가 어느 단계까지 오면 자기는 이제 대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식의 사람들도 많이 있기는 하며 또 거기까지 오면 참 대사를 만나는 길도 열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람이 유일 참 생명(神의 생명)외에 다른 살만한 생명 혹은 생활 법이 있다고 마음속에 생각한 때에는 이미 그 사람은 완전히 조화(調和)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원래 인간은 영적으로는 즉,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타락한 일도 죽은 일도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생명과 조화되지 못한 것뿐이다. 이것이 이미 모든 재앙과 화근이 되어 오는 것이다. 사는 것이 귀찮게 될 때 그것은 이미 생명이 아닌 것이다. 이 상태는 본래의 神의 생명에 복귀하라는 경고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처음부터 구비되어있는 모든 좋은 것에 접촉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요구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사나 일반 교사에게 접촉하여도 대사의 것이 실은 자기의 중심에서 요구하는 것임을 깨닫기 전에는 무익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계 속)

                                             초인생활 下/선경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