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주 (宇宙)

1. 우주란 神의 별명

무한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의 총칭이 우주이다. 우주는 거대한 총집합체로서 각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 우주는 神의 별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神은 "나는 있고 있는 자이다. 나 외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자기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 모든 질료, 모든 지혜, 모든 능력의 총계이다. 그 중에 모든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지(全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능력의 집계(集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능(全能)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질료의 총화이다. 왜냐하면 그 중에서 모든 보이는 것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애(全愛)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일 조직으로 결성되어 단일 체로 유지되고 그 활동을 모두 완전한 조화 속에 규칙 바르게 결합시키게 하는 결합원리이다.        

2. 우주에서 분리

대사(大師)들은 우주를 모든 것이 "편만 하고 있는 상태"이며 모든 상태나 환경은 우주, 즉 "편만 하여 있는 것"의 일부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우주에서 분리하는, 즉 자기는 우주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머리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머리 안에서만 우주와 별개의 독립한 존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주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의연히 대우주의 일부인 것이다. 생각만으로는 이 대우주와 별개의 존재로도 되는 것이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분리, 즉 한정감(限定感)으로 둘러싸게 되어 머릿속에서는 이 대우주로부터 분리되어 전락한다. 즉 능력이 저하되고 결국 자기가 소속하여 있는 이 우주에서 어떤 의미로는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3. 방탕자식(放蕩子息)의 비유

물론 편만한 만물에서 자기 자신을 분리하거나 소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시 의식 속에서 이 편만 하고 있는 원리에 돌아온다면, 그는 이 원리(우주 . 神)와 일체가 되고 그 능력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방탕자의 비유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여러 나라를 방랑하면서 가진 돈을 다 낭비하여 버렸으나,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 기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집에 그대로 있던 형은 질투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날만 환영 잔치를 한 것이 아니고, 항상 집안에서는 날마다 사랑의 향연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보편적인 것"(神 . 우주 . 神我)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또한 비록 팥 껍질을 먹고 지내고 있었어도 일단 아버지 집에 돌아  오려고 결심만 한다면 아버지 집에는 이미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버지(神)로서는 아들이 떠나 있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아무리 멀리서 방랑하고 있어도 그 마음이 아들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무지와 분리관념의 항구화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神의 마음 속에는 인간을 떼어버린다든지, 인간을 미천하고 허약하다고 보는 일은 결코 없는 일이다. 그보다 神은 언제나 인간을 돌보며 인간이 본래 받을 축복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한다. 인간은 이 神의 목적 수행을 자기 자신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해되는 것을 제거를 하여야 할 것이다.    

4. 분리는 불가능

일체의 이별, 고립, 한정감은 단지 허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리가 현실의 증거에 사실로 나타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우주는 일개의 완전 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윗이 노래한 바와 같이 "내가 당신의 영을 피하여 어디로 가오리까"한 것은, 보편으로 된 조직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사실이 노래가 된 것이다. 그가 아무리 땅 끝에 가고, 하늘 끝에 오르고, 지옥을 침상으로 한다 하더라도 의연히 이 보편관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죽음으로도 이별은 없다

죽음이 와도 한가지이다. 사람들은 사별(死別)이란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나 실제에는 그런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그가 이 세상에서 친하게 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죽은 후에도 의연히 그들의 신변(身邊)에 살(居)고 있는 것이다. 다만 상념 속에서 이별하고 있는 것이다. 초 의식 안에서는 어떠한 이별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이별이라든가 분리라는 관념을 제하여 버린다면 이별 같은 것까지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의식 속에는 없었던 까닭이다. 아니 좀더 확실한 표현을 한다면, 이별은 다만 무의식 즉, 실상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은 없다. 죽음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이 신성(神性)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추방하여 버린 데서 신체가 지탱할 수 없게된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신체의 생명은 신체를 창조한 영이다. 무지 때문에 신체의 생명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의하여 몸이 완전히 지배  됨으로써 몸은 그 전체에 참된 지지력을 잃어버리고 그 때문에 더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것이 소위 죽음이다.

神이 창조한 영인 유일의 인간은 神이 영원한 것과 같이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이다. 단신의 상념은 그 상념의 표현 수단으로 된 형체가 파괴되어도 살수 있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神의 이념도 그 표현으로 지은 육체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와도 오히려 생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神 즉, 원리 중에 이 원리와 함께 존속한다. 神과 분리감을 일의 키는 원흉이 되는 무지(無智)를 의식에서 제거하여 버리면 신체 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인간 자체는 만물과 영원히 일체이며 그것이 사실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6. 무지(無知)만이 분리

분리나 이별은 외형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實在)의 속에는 그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우주가 단일체로 되어 그 속의 것은 영원히 결합되어 단일의 통합체가 되어 있는 이상 분리 같은 것이 어떻게 하여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실제 그것은 다만 상상으로 된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분리란 것이 있다면 진실에 대한 무지에 의하는 것뿐이다. 이 같은 것을 깨달으면(開性)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참으로 神이 큰 一자라면 만물과 만인은 그 가운데 포용되어 있을 것이며, 포용되어 있는 이상 모든 것은 神안에 있어, 神과 함께 하나인 것이다.      

7. 조화의 생각이 제일

우리의 실존 그것이 일개의 완전한 우주로서 우리가 모든 부조화나 분리라는 관념을 제거한다면, 우리의 실존은 완전한 조화를 보존하면서 활동하는 것이다. 언제나 조화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서로는 원리(神)라는 일치에 귀합 되어 서로 一神이 되는 것이다. 그 반면 우리는 조화에서 몹시 벗어났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병이나 기타 좋지 아니한 상태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화에서 이탈된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어디 가든지 참된 것은 완전한 조화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엇하나 우리 생활에 부조화 상태가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편적 우주원리에 조화된 관계 중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여 파동을 일으킨다면 부조화가 생겨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은 인간에게 있어 유일의 적(敵)이다. 진실에 대한 바른 지혜를 얻으면 무한한 공간에 충만하고있는 힘에 동조하게 된다. 이 힘은 전부가 인간에 대하여 우호적이고 인간을 위하여 건설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원리 중에는 원리자체를 배반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간 자신은 소우주로 대우주중에 있는 모든 것이 인간의 본질,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간은 무한의 힘과 가능성이 나타나는 직접적 중심위치를 접하고 있으며, 또 그 기관인 것이다.      

8. 조화의 열쇠는 주는 일.

부조화가 나타나는 것은 우리들이 자기의 신체의 파동을 내리는 까닭이다. 우리들이 당연히 있을 조화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그 외의 이유란 없는 것이다. 완전한 조화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버린다면, 조화를 숭배해야할 것이 부조화를 숭배하는 일이 된다.

"인간이 본래 항상 조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예수가 가르치는 것도 이것이었다. 예수는 대원리(神)의 대 조화를 직접 말한 것으로서 실상에 있어서는 우리는 항상 이 대 조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봉사하지 않으면서 이웃이 자기에게 봉사하여 주기를 바라는 가기 본위의 이기적 욕망을 우리가 버리기만 한다면 이 대 조화는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가 아니고, 위(神)로부터 기대할 것이며, 우리가 세상에 대한 태도는 주는 일에 있을 뿐이다.        

9. 神에 가까워지는 길(道)

조화를 떠나 자기를 고립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자기는 남에게 봉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상대가 한사람이든 백만이든지는 이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봉사를 남에게 요구한 때에는 반드시 신과 인간은 분리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봉사할 때 우리는 神안에 잠겨 있는 것이다. 자기를 주면 줄수록 우리는 자기가 본래 소속하여 있는 神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다.    

10. 생명에너지의 증감

봉사와 사랑과 조화를 주는 일은 신체에서 에너지를 빼내는 일은 아니다. 다만 부조화 즉 비화합의 상태를 일으키거나 혹은 부정적 상념과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의 신체에서 에너지를 빼앗는 일이 된다. 적극적인 말과 조화의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낼 때마다 우리 신체에 에너지를 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같은 말을 낼 때마다 우리 자체가 어떤 힘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 힘은 방사 에너지와 함께 우리에게 돌아와서 에워싸는 것이다.

진실로 말하면 자기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나 물체에 기대하는 한, 평안과 조화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으며, 우리 자신 중에 있기는 하여도 그 열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눈을 뜨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을 준다든지 우리의 필요에 응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사람들이 아니다. 좋은 선물은 모두 위에서 오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은 대원리 즉 神에게 와서 활동한다. 개인 개인을 통하여 나타나고 神 자신을 神의 본래의 상(相)을 봉사로 통하여 세상에 준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을 역행하여 먼저 자기가 행복 되고 조화되어 그로써 자기 신성에 도달하려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먼저 자기에게 줄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실망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神은 태초에 있음과 동시에 인류의 위대한 봉사자이다. 神의 성령을 받는 일이 神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한 태도는 큰 선물을 우리 주위사람들에게 전부 주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풍성한 봉사이다.
              
11.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알라.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보편생명의 활동에 충실한가를 대사들에게서 교훈을 받는 다든지 배울 필요도 근본적으로 없다. 생명의 원칙에 반할 때에는 마치 음악의 원칙에 반할때와 같이. 자신이 알게된다. 음악을 배운 일이 있거나 없어도 음의 부조화에는 누구나 즉시 알게 된다. 그와 같이 무엇인가 부조화나 불쾌가 마음속에 떠오르면 자기의 실존의 법칙을 범한 것으로 알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실존의 법칙을 범한 것 뿐 아니라, 자기의 신체에 부조화 상태까지 만들어 버린다. 무릇 부조화의 감정과 정신상태는 인간의 참 성질(實相)에 대한 죄이다. 인간의 마음에 조화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 평안, 자유, 힘, 조화의 감을 주는 것이 생명과 직접 서로 조화되고 따라서 조화에 충만한 결과만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본질이 생명의 책(書)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 내부성질에 있는 "구원(久遠)의 본질"을 배워서 자기 성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확대 신장한다면 그는 자기를 알고, 우주를 알고, 우주법칙을 아는 자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배울 선생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12. 대조화(大調和) 실현의 방법

인간은 마치 화학 실험실에 있는 시험관 같은 것으로 조화라는 용액(溶液)을 넣으면 조화의 결과를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부조화 상태를 일으켜서 부조화의 결과를 얻든지 수확이 없게되고 만다. 혹은 시험관 속에 큰 병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나 넣는 것이 참된 시약이라면  그것은 아무 부조화는 아니다. 우리의 신체도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조화의 상념이나 감정만이 상대방에서 나오도록 하고 이쪽에서도 그 같은 상념이나 감정을 상대방에게 주도록 한다면 부조화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이쪽에서 조화를 보낸다면 절대 부조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자기 주위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미 조화된 이상 그 분위기에서 부조화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조화보다는 조화의 힘을 더 많이 의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조화인 까닭이다. 대조화의 실현은 부조화 같은데 절대 눈을 돌리지 않는데서 성취된다.  

이 일은 자기 성질 중에 동란도 있고 평화도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명확한 일이다. 자기의 성질 속에 허망(虛妄)이 들어 있을 때에만 이 동란이 오는 것이다. 그 성질 속에 조화를 받아들일 때는 그가 조화 중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화학자라 쓴 것과 단것(환락)을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13. 사랑이 가장 큰 것이다.

의식에 대하여 자기는 잘 알 수가 없다고 한다면, 가능한 한 사랑을 주고 사랑이외의 것은 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화롭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사랑을 모든 것의 앞에 두었다. 헨리 드라몬드씨의 "사랑은 세계 최대의 것"이란 저서가 있는데 이 책은 어떠한 상태가 일어나더라도 조화 속에서 해결할 완전한 열쇠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저술 중에는 가장 평범한 것으로 작은 책이지만 널리 읽어지고 있다. 전부 읽은 데는 10분 내외면 되지만 그 내용을 생활화하는데는 일생이 걸린다. 그것을 생활화하여 사는데는 완전한 조화와 완전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14. 진보를 멈추게 하는 것

사람이 만약 부정적 입장에 서서 영적인 것, 즉 완전한 실상에 속하는 것을 부정하여도 영적인 것 그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일지 않는다. 영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영(實相)은 영원히 불변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은 자기의 진보를 막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는 일이나 할 일에 대하여 이쪽에서 생각하는 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급전직하(急轉直下) 조화로 인도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도 "그를 그냥 두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예수는 그의 언동을 속박하지 않고 방심하여 두어 그 자신이 "내가 神의 아들이란 자각을 얻도록" 그 특권을 준 것이다. 사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실상에 있어서 神의 형상을 가진 神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15.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의 외관을 보고 "세계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계 그 자체에는 그런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보는 바 외형 같지는 않은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여러 가지 한정된 것으로 충만하고 있지만 참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우주를 소재로 하여 형성된 까닭이다. 세포의 하나 하나까지도 우주의 복사라고 과학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먼저 우주가 무엇인가를 아는데 따라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에 의해서 인간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그의 본래상(本來相)의 하나인 본질적인 영지(英知)를 나타내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외부를 관통하여 내부의 실제를 철견(撤見)하면 "이 세상에 고립된 것은 하나도 없고 만물은 신의 법칙에 의하여 서로 혼합되어있다" 이렇게 하여 나와 세계가 완전한 조화와 완전한 자유에 충만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실존과 자기 속에 흐르고 있는 神의 목적에 무엇이 조화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음악의 협화와 불협화음을 아는 것 같이 쉬운 것이다 후자를 완성한 음악가는 즉시 아는 것 같이 일반사람들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불협화와 부조화를 분간하는 것은 가장 무지한 자도 대사와 같이 쉬운 일이다. 우리 자신이 본래 그대로 완전하다는 완전간을 흐르게 만드는 정신적 혹은 감성적 반동을 잘 분간하여 그런데 마취되지 않도록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16. 사랑의 분위기.

"태초에 지상에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리스도(神我 . 實相)도 함께 태어난 것이다" 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고" "세계가 창조되기 전 태초에 영광이 나와 너에게 있었다" 어떤 말이나 거기에 사랑을 추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가 가르친 바와 같이 그리스도(內在의 神我)와 동조하여 활동한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감싸면 그 영향력은 조수와 같이 그 영적인 힘이 조수와 같이 밀려와 일순간에 그의 모든 사상을 변환시킬 수가 있다. 사랑으로 둘러쌓다 고 해서 그를 압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분위기야말로 그의 본래의 환경인 까닭이다. 제압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부여한 것뿐이다. 그로 인하여 그의 생활이 변할 수가 있고 또 우리 자신의 생활과 사상도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실상만 본다. 즉 神이 그를 보는 것과 같이 그를 볼뿐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무슨 방해가 되거나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여러 가지 장애와 악영향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神에 의한 그의 창조 장소였던 본래의 영적 분위기,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본래 생존 하여야할(즉, 實相, 人間=神我가 生存하는)상태로 그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기 신성을 망각시킨 것은 아담이 아니라 무지(無知)이다. 실제로는 아무 속박도 없는데 자기를 결박하는 것은 무지이다. 모든 공간에 무한히 충만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사명은 무한 일체가 우리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의 재능은 계산할 수 있다는 데 눈을 떠야한다.    

17. 적을 사랑하라.

나의 적(敵)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자신을 높이고 동시에 상대방을 적대감정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상대방에 대하여 이중 봉사를 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 선물을 상대방에 하는 것이지만 대가는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품었던 생각을 모두 실토하고 오히려 더 친밀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8. 사랑의 특권

지금가지 친구로 믿었던 자가 당신에게 큰 악을 행하고 해를 주었다 합시다. 그렇다 하드라도 그 사람이 당신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사태는 급변하여 버린다. 그와 같은 일은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인 것이다. 특권은 우리의 봉사 일체를 촉진하는 최대의 원인이다. 자기의 적을 사랑하고 그들을 높이는(高揚) 일은 진실로 특권이다. 왜냐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자기도 높아(高揚)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敵)을 높이고 더욱이 그가 자기보다도 높은 경지에 있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대의 거룩한 일이다.

19. 참 성의(誠意)

이것을 습관으로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의이다. 왜야하면 정성이란 완전히 결점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성이란 완전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대한 적대행위 때문에 내가 품고 있는 악감을 나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하여 자기에 대한 큰 특권을 부여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에 당신은 그 사람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당신은 그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된다. 그를 다만 마음에서 제거하기만 하고 높이는 일이 없이 방치한다면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의식 속에는 아직도 수정해야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간의 사정은 이렇다. 그가 당신의 의식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당신은 그를 몰랐다. 그러나 어떤 사태가 일어남으로서 그를 완전히 의식하게 되고,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그와 당신 사이에는 개재한 노염과 미움 등의 의식을 교정하기 위한 조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필요한 조력을 얻어 그를 높여 줌으로서 그와의 문제는 끝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그의 일을 자기 마음에 풀어주고 그가 당신의 생활에 들어오기 이전의 화평한 상태를 복귀하게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당신의 의무는 다하였고 높임도 끝나고 단신들 쌍방 간에는 거리낌없는 자유로운 심정을 얻어 서로 앞서와 같은 생각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의 의식에는 꺼림 직한 상처가 남게 되는 것이다.        

20. 사랑은 자유에의 회복제

완전 원만한 것은 의식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접촉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안전감도 자기의 의식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와 접촉하여보고 그 사람에게 어떤 불안전한 상태를 발견한 순간 나의 의식에 그의 불안전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원래의 완전한 조화가 회복되기 위하여서는 그 같은 의식상태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사랑만이 유일한 마음가짐이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보편적인 용화제(容和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神의 우주 계획 중에 있어서 본래의 상태에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하여서만 자유가 되고, 이렇게 하여야만 인간은 상대방을 또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21. 사랑은 우주의 본질

사랑이 아니고는 저들을 풀어주고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긍휼은 해방의 방법이 못된다. 긍휼은 자기를 불안전에 한층 더 가깝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긍휼하게 여기면 결국 자기를 점점 더 불안전에 결합하게 되며, 타인에 대한 긍휼도 또한 같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긍휼은 모든 문제를 그 사태를 낮은 상태로 떨어트려 버리지만 진실한 사랑은 같은 사태를 우주의 그 정당한 지위까지 높이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상념인 것이다. 예수는 그 자신과 주위사람들을 사랑으로 높이(高揚)였다. 진실로 사랑이야말로 우주자체이다. 완전한 사랑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합일하여 보편적인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대 교훈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주의 법칙이다. 사랑이 정열 되어 그 사람을 지배할 때 그는 무한한 우주의 힘과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속에 있는 자는 神안에 있는 것이다.

무한자와 불가분의 합일체로서 각 인간 중에서 가장먼저 개발될 것은 사랑이다. 무한자와 일체 되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자의 표현 전부와 일체이라고 해서 세속이나, 이웃이나, 자기 속에 있는 모든 불완전한 것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불안전한 것을 의식 중에서 제거하고 神을 보고 神을 아는데 방해되고 있는 이 외측과 가면의 배후에 있는 신성(神性)과 합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22. 의식(心)과 우주

그 사람의 의식 상태에 의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우주가 크고 어떤 사람에게는 우주가 작아지기도 한다. 그 사람의 의식의 상태에 의하여 1개의 원자가 또는 1개가 뭉쳐진 육체가 또는 무수부재한 神이 그 사람에 있어서 우주가 된다. 우리들이 "보편적"이라 할 때 만약 전체에서 떨어진 부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의 사용법은 바른 것이다. "보편적"이라 함은 마치 빛이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듯이 일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에 있어서는 "마하바라다"중에 다음과 같은 좋은 말이 있다. 즉, "빛을 보면 편만한 모든 것을 본 것이 된다" 그 이유는 빛은 "편만한 것"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말을 높인 순간에 그것은 빛이 된다. 우주는 무한이다. 한도 같은 것은 인간의 개념이외는 없는 것이다. 동물도 결코 자기한정을 하지 않는다. 자기한정을 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23. 우주 팽창설

우주 팽창설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주가 인간의 상념 중에서 팽창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인간이 자기의 우주관념을 팽창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바른 것이다. 우주를 조사하여보면 언제나 인간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큰 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주는 그 사람 자신의 관념에 따라 팽창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나 우주 자체가 팽창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무한의 총화(總和)이기 때문이다. 우주라 하면 일개의 태양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나 태양계란 무수한 태양계로 구성된 우주중의 세포, 원자에 불과한 것이다.

24. 우주의 근본 법칙을 파악(把握)하라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단 하나 뿐이다. 왜냐하면 우주 자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유일의 근본법칙 외에는 하나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유일한 근본법칙뿐 우리들이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인간은 법칙의 하나인 인력(引力)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 법칙의 의식적인 현상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 이들 현상을 통괄하고 있는 법칙 그 자체, 즉 근본법칙에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법칙의 현상 같은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었을 때 즉시 모두의 모든 근본법칙 그 자체, 보편적인 근본원리 그 자체, 근본법칙을 완전히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칙이라는 개개의 현상이 전부 우리를 따르게 되고 우리는 그 전체에 완전한 권능, 완전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미국)사람들이 미국의 헌법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준다면 그는 헌법이외의 모든 법률에 자동적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최고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모든 법칙에 대한 일체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주의 법칙은 사랑이다. 만약 사람들이 神과 인간과는 본래 일체인 것을 자각하고 사랑으로 생활한다면 그 이하의 법칙에 위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한히 자유롭게 무엇이나 제약받지 않는 생활을 자연히 하게 된다. 이 같이 하급 법칙에 의한 속박감은 일체 없게 되는 것이다.      

25. 물질은 마음의 현상

"물질의 법칙"이라는 하급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상이 "물질성"이나 "언제는 죽을 것이라는 죽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담(원시의 이상적 인간)에게는 없었던 일이다. 아담의 다음 대(代) 인간부터 시작된 일이다. "상념"이 "의식"의 한 양상에 불과한 것처럼 "물질"도 의식의 한 양상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란 마음의 고정된 습관에 불과한 것이다. 상념과 물질은 실은 표현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어느 것이나 한정하여 생각할 것은 아니다. 아담은 자기의식을 나타냈었으나 그것은 언젠가는 죽어 없어지는 의식이 아니라, 없어짐이나, 죽음이 없는 의식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가 지상에 와서 오랫동안 지낸 후 아담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26. 神의 법칙이 곧 사랑이다.

대사(大師)들에게는 물질우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우주는 대사들에 있어서는 대현영(大玄靈)의 나타남이며, 따라서 그 본질은 영적인 것이며 대현영의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대사들에게 큰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지혜이며 개개인(個個人)에게도 힘을 얻는 모든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현영의 법칙을 알고 그것에 동조하여 사는 것은 항상 무한의 힘인 것이다.

대현영의 법칙이라는 것이 사랑의 법칙이다. 무한의 공간과 이 공간에 투영되어 있고 일체의 형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사랑뿐이다. 인간은 사랑 안에 있으면 神안에 있고 神 또한 인간 안에 있다고 성서가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조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와 조화시킬 뿐만 아니라 서로도 또한 조화시키는 젓이다.            

사람이 사랑의식, 즉 모든 것과 완전히 합하여 일체라는 의식 상태에 있으면 그는 만물과 만인과 완전한 조화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말하자면 집결력, 즉 만물을 그 본원에 결합시키는 힘인 것이다. 그 본원과 동조하여 활동하므로 말미암아 서로간에도 그 본원이  영현(映現)하여 일체의 피조물과 서로 조화하여 활동하게 된다. 한편 사랑은 또한 우주의 질서에 조화되지 않는 것은 모두 용해하여 버린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의 실상, 즉 대현영의 월리 에 완전히 따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움, 탐욕, 이기, 자아의 추구 및 그와 같은 의식상태에서 나오는 소아(小我)를 파괴한다.        

27. 인간은 우주의 복사

인간은 완전한 우주의 복사이다. 이 우주라는 전체에 몰입(沒入)하면 그 자신의 내부도 또한 일개의 완전한 우주가 되는 것이다. 일체의 신조나 독단을 제거하여 버리면 우리는 완전한 미신에서 해탈하여 완전히 무한자(無限者)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한정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 전신의 전 세포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 사진을 통하여 현재 증거 할 수 있다. 동시에 또 우주의 전 세포에서 빛이 방사하는 것이다. 광막한 대우주와 신체와는 우주를 활기 있게 하며 또 여기 충만하고 있는 빛과 에너지의 본원은 대 중심 태양이다. 우주적이라 함은 "크다"는 뜻이며 인간은 그 일부로 하는 전체(全體)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은 단일 조직체로 조직되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주자체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측의 개개인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실상을 아는데서 해탈이 오게되는 것이다.

                             초인 생활 下 / 선경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