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붓다 그리고 기타 영적인 지도자들은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을 내면화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진리 그리고 붓다의 본질 속에는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반-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반-그리스도의 마음은 단지 그리스도의 본질에서 벗어나, 단절되어 있을 뿐입니다. 반-그리스도는 자기만의 세계, 즉 두 개의 상반되는 것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반-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의한 그리스도의 진리를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惡)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善)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상대적인 선에 반대되는 상대적인 힘입니다. 그리스도화한 존재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들 간의 투쟁에 결코 휘말리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화한 존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하나의 비전, 즉 온전한 비전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화한 존재는 상대적인 악을 상대적인 선으로 대체하거나, 상대적인 악을 제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로지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모든 이원성적인 투쟁에서 벗어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으며, 그것은 이원성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각인된 이미지(우상)와 기본적인 세계관이 환상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가 없으며,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원성적인 의식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믿음체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자신이 죽게 될 거라고 믿고 있으며, 이것은 사실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의 본질이며, 세속적인 자아가 주로 사용하는 수법은 자신의 이원성적인 세계관, 즉 기본적인 사고체계가 결코 잘못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세속적인 자아가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세속적인 자아에게 확신시켜줄 수가 없으며, 세속적인 자아가 자신이 태어난 이원성적인 의식을 꿰뚫어보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이원성적으로 반대되는 믿음들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데, 다시 말해 자신의 믿음들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영원히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세속적인 자아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자신의 정체성, 즉 자아의 구체 속에 지니고 있는 내용물을 뛰어넘는 실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정의하는 모든 개념들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태어난 이원성적인 믿음들과 별개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믿음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면, 세속적인 자아는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자발적으로 그만둘 거라고 기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의식적인 여러분이 세속적인 자아를 만들어냈으므로, 그러한 자아를 창조한 것을 무효화하기 위해, 의식적인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와 분리되고,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사용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여러분의 존재에 대한 무결한 개념, 즉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 무결한 개념을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사진(무결한 개념)은 물질세계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기 위한 초석(lodestone), 즉 그리스도의 바위가 되도록 되어 있으며, 여러분은 이러한 토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법칙들과 일치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반-그리스도의 의식을 이용하여, 자신이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인물, 즉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리스도로 자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원성적인 마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를 왜곡하는 그리스도의 사기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삶의 의식이 아니라, 죽음의 의식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거짓된 권위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삶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면, 구원이 보장되겠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여러분은 지옥으로 가게 될 거라고 합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권위 있는 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세속적인 자아는 오직 두려움을 이용함으로써, 즉 세속적인 자아가 요구하는 권위를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조차 꺼리는 두려움을 이용함으로써, 그러한 자리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아에게 안내를 요청하면서, 이것을 살펴보았다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가 주장하는 것을 꿰뚫어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초월하여, 더 큰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구축해놓은 이원성적인 이미지, 즉 각인된 이미지를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는 위협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자아는 생명의 강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존속할 수가 없습니다. 정지해 있는 것들은 앞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는 생명의 강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위협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까요? 이원성적인 의식은 상반되는 두 개의 극단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극단들을 선과 악, 혹은 흑과 백, 아니면 여러분이 원하는 그 외의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이러한 극단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며, 둘 다 그리스도의 진리 밖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원성에 갇혀 있는 한,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과 갈등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안전에 대해, 세속적인 자아는 궁극적인 환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렇게 하기 위해, 오류가 없는 믿음체계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다양한 문명들이 종교적인 혹은 정치적인 믿음체계를 정의해왔으며, 그것이 궁극적인 시스템, 즉 오류가 전혀 없는 절대적인 진리에 기초한 시스템이라고 단정해 왔습니다. 이원성의 세계에서 정해놓은 개념은 어떤 것이든,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므로, 본질적으로 모든 “궁극적인” 믿음체계는 반대되는 개념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체계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된 신자들(true believers)”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켜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며, 또한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에 달하게 되면, 유일한 참된 믿음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 자(者), 즉 하나님 혹은 자연의 힘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생존하고자 할 것이므로, 여러분의 절대적인 믿음을 말살하기 위해, 이들도 여러분의 믿음을 자신들이 믿고 있는 오류가 없는 종교로 바꾸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속적인 자아가 각인된 이미지를 구축하거나, 수호하기 위해, 어느 한 쪽의 극단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세속적인 자아는 자동적으로 반대되는 반응을 만들어냄으로써, 잘못된 이미지를 부수려고 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행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지닌 환상을 위협하는 힘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세속적인 자아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끝없는 투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이러한 투쟁을 자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자아는 이원성적인 의식을 뛰어넘어, 그 너머를 결코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지닌 이미지가 옳은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들이 이러한 자신의 참된 믿음을 말살하려 한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세속적인 자아)의 이미지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틀림없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짓된 이미지를 믿는 세력들이  자신과 자신의 참된 이미지를 말살하려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는 거울이므로, 만약 위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내보내면, 우주의 거울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믿음체계를 위협하는 환경들을 되돌려주게 될 것입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은 현재의 믿음들을 초월하여, 고차원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원성에 기초한 자극을 보낸다면, 우주의 거울은 이원성을 표현하는 상황들을 여러분에게 되돌려주게 될 것이므로, 여러분의 삶은 투쟁이 될 것입니다. 내가 전하고자 메시지는 우주가 풍요로운 삶을 되돌려줄 수 있도록, 이원성을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이러한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으므로,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의 각인된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완강히 버틸 것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거울로부터 오는 위협적인 반응을 많이 체험하면 할수록, 세속적인 자아는 그러한 이미지를 더 강하게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은 상황들 속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갈등에 휩싸여 있거나, 심지어 절대적인 믿음체계에 기초하여 전면적인 전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각각의 그룹은 자신들의 믿음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말살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체계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각각의 그룹은 자신들의 믿음체계가 존속하느냐 여부에 따라, 전 세계의 생존이 달려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그룹은 상대적이고, 이원성적인 믿음체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각각의 그룹이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에서 벗어나면, 생명의 강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실 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절대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 저항하게 될 때, 여러분은 이원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악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해결책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거울은 공동 창조자들이 보낸 것을 되돌려 주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이면에는 불완전하게 실현되어 있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공동 창조자들이 불완전한 이미지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세속적인 자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되돌아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는 것을 반드시 바꿔야 하며”,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라.”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거울은 여러분이 갇혀 있는 모든 이원성적인 환상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원성적인 믿음체계 속에 갇히게 되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거울 속으로 두려움을 내보내게 되면, 실제로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과 대면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의 삶을 관리하도록 한다면, 여러분은 오로지 자신의 믿음들에 위협이 되는 것을 없애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끝없는 투쟁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본성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거울 속으로 보내는 이미지들로 인해,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세속적인 자아는 결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위협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위협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이러한 굴레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으므로, 만약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의 삶을 관리하도록 허용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의 기나긴 투쟁이 될 것입니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환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며, 세속적인 자아의 끝없는 투쟁에 연루되지 않는 것뿐입니다.

 

태생적으로,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의 세계관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우주의 거울로부터 반사작용(과보)이 되돌아올 때, 세속적인 자아는 그러한 상황을 처리하도록 강요받게 됩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의 믿음체계에 위협이 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요? 우주의 거울로부터 유쾌하지 않은 반응을 받게 될 때, 자신들이 내보낸 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리라 희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설계하셨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들로부터 벗어나, 풍요로운 삶으로 돌아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의사결정을 하려 하지 않고, 도전적인 환경을 회피하려고 하며, 세속적인 자아가 그러한 반응에 대처하도록 허용한다면, 이러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의 환상이 옳은 것이라는데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체계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세속적인 자아는 위협을 피하고, 우주의 거울로부터 오는 유쾌하지 않은 반응을 피하는데, 급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협을 피하기 위해, 세속적인 자아는 심리학자들이 “투쟁 아니면, 도피(flight or fight)”라고 부르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보이는 첫 번째의 충동(impulse)는 위협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위협을 모면하고, 외면하며, 부정하거나, 이원성적인 추론으로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은 언제나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장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변명을 늘어놓음으로써, 대체적으로 위협을 모면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물질세계에서 항상 위협을 피해 갈 수는 없으며, 또한 물질적인 환경을 언제나 회피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위협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을 때, 세속적인 자아는 싸우려고 하는 형태를 보이게 되며, 이제는 위협을 제거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 말은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처럼, 육체적으로 말살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심령적인 수단을 통해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혹은 물질 또는 심령적인 폭력을 통해 침묵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말살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