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의 환상, 즉 하나님과 최초로 분리되게 했던 환상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존재하고 있으며, 먼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직도 길(path)에 대한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한 번에 한 계단씩 계속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이 거리감이 아니라, 가야 할 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감은 환상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여러분은 줄곧 하나님의 나라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계단에서 마지막으로 내디뎌야 계단은 계단에서 벗어나서,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의 나라 속에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곳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여러분은 길을 따라 여행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길을 버리고, 여러분이 지금, 여기 왕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존재한다는 것이 자기 초월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더 커지는 과정에 있는 생명의 강입니다. 또다시, 이것은 세속적인 자아가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입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 목적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여, 모든 진보가 멈추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여러분이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여러분이 생명의 강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장을 멈추거나, 속도를 늦출 수도 있지만, 생명의 강은 여러분이 하지 않아도, 계속 전진해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은 진보를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 목적은 생명의 강으로 다시 데려다줄 계단들을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강에서 당초에 있어야 할 장소로 여러분은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길에서 마지막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생명의 강 속에 잠기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뒤처진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강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은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뚜렷한 계단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단지 하나님의 존재가 부드럽게, 영원히 흐르고 있을 뿐이며, 모든 생명은 그 속에서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의 전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높이 오르고, 이원성적인 환상들을 노출시키기 위해, 여러분은 길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 어떤 것들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행위를 멈추고,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을 받는데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원성과 분리의 환상 속에 여전히 갇혀, 자기 자신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길에서 어느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주게 될 때까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해, 많은 영적인 구도자들이 교착상태에 갇히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동기(動機)에서, 그리고 세속적인 자아의 이원성적인 동기에서, 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도 줄 수가 있지만, 오로지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만, 주게 될 뿐입니다. 이원성적인 세계관이 지니고 있는 제약적인 시각에서, 세속적인 자아는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의식적인 여러분을 분리시켜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모든 생명을 끌어올려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더 큰 비전에 의거하여,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게 될 때, 사심 없이 주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일부에게만, 즉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끌어올리기 위해 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심지어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는 것은 자신의 재능을 증식시키게 될 것이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주의 거울에 반사되어 더 풍요로운 삶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는 것은 주는 행위가 보답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태양, 즉 하나님의 빛의 화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주는 행위가, 그리고 빛을 방사하는 행위가 자신이 지닌 본성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돌려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신을 나누는 것이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주는 것은 그 자체로 보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은 주는 행위 속에 존재하는 보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하다는 내적인 느낌이며, 또한 주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내적인 느낌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저 준다는 것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저 주지 못하는 결핍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열쇠는 모든 것을 크게 하기 위해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위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것들이 변형되어, 더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의 속성인, 도주 아니면 맞서 싸우는 반응에 대해, 나는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길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되면, 세속적인 자아도 아주 교활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수십 년간 성실하게 영적인 길을 걸어온 많은 영성인들이 아주 교활한 형태의 “도주 아니면 맞서 싸우는 반응” 속에 여전히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감을 위협하거나, 자기초월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도망갈 수가 없다면, 이러한 것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흔들지 못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도주 아니면 맞서 싸우는 이러한 반응 속에 휘말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이 자신을 통해 흐르는 것을 차단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이 여러분의 평형감(sense of equilibrium)을 위협한다면, 즉 통제되고 있는 존재감과 안전감을 위협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거나, 아니면 맞서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은 자동적으로 차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의 왕이 하는 거짓말, 즉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도 불완전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사랑이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 흐르게 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을 크게 하여, 그러한 상황을 고차원적인 상태로 변형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빛과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지 못하게 될 때, 여러분은 생명의 흐름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로 인해 자신만의 기쁨과 풍요로운 느낌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경우에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이 흐르는 것을 차단시킴으로써, 여러분은 불완전한 상황을 좀 더 고차원적인 상황으로 변형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결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이며, 무결한 개념은 이원성적인 믿음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지만, 이원성적인 믿음들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하게 할 뿐입니다.


풍요는 결핍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만약 풍요로운 상태에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은 여러분의 풍요를 타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여러분에게 주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풍요감을 차단시킴으로써, 여러분은 생명의 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결핍의 이미지를 우주의 거울 속으로 투사하게 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우주의 거울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되돌려주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세요?


이 지구에는 이처럼 낮은 형태의 “도주 아니면 맞서 싸우는 반응”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이 행성의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 혹은 반목 속에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영성인들은 이와 같은 명백한 에고-게임에서는 벗어나 있으며, 복수(復讐)를 하기 위해 타인들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보다 더 교묘한 형태의 에고 게임, 즉 불완전한 것들이 지구에 존재할 수 있게 하거나, 타인들의 잘못들로 인해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이들의 존재를 통해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교묘한 형태의 에고 게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자신의 존재를 통해 흐르는 것이 차단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빛을 비추는 태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외형적으로 불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단지 불완전한 틀, 즉 각인된 이미지 속에 갇혀 있는,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란 바로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의식적인 여러분들(conscious selves)이거나, 아니면 불완전한 형태 속에 갇혀 있는 물질의 빛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모든 불완전한 것들로부터 다른 사람들과 물질의 빛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불완전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더 커지도록 도움으로써, 무결한 개념에 좀 더 근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은 생의 기간 동안, 여러분은 “도주 아니면 맞서 싸운다.”라는 이러한 반응 속에 계속 갇혀 있을 수도 있으면, 아니면 이러한 반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진지하고도, 확고한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강좌를 통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준 모든 내용들은 세속적인 자아의 이러한 끝없는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열쇠, 즉 조치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도구들을 적용시켜감에 따라, 여러분은 실제로 더 높이 상승하게 되겠지만, 나는 도구를 하나 더 전해주고자 하며, 이 도구는 여러분이 풍요의 길에 뿌리를 내리는데 아주 효과적이고, 즉각적인 조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도구는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모든 것들을 변형시켜, 보다 완벽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완전한 것들을 회피하거나, 불완전한 형태들을 없애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완벽함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핵심적인 도구는 여러분이 마주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연관된 모든 사람들과 외적인 상황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타인들이 여러분에게 무슨 짓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더 잘 알게 되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들을 축복하려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