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善)과 악(惡) 사이에 거대한 싸움이 존재한다고 믿도록 세뇌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구시대의 많은 종교들에서 다루었던 주제이지만, 그러한 종교들은 집단의식이 오늘날보다도 낮았던 시대에 전해진 것들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주제는 신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의 오락산업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는 책 및 영화들 속에서, 흔히 한 무리의 악당들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처음에는 대결을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상황이 나빠지게 되면서, 더 이상 악의 세력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주인공은 무력을 사용하여, 악당들을 물리치고, 악을 이기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설득력이 있는 표현으로서, 다양한 근원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프로그램 되어왔습니다. 그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미지는 반-그리스도의 의식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은 두 개의 극단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양극단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왕은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계획은 아주 단순하지만, 효과는 아주 대단합니다.


이 세상의 왕은 선과 악 간에 싸움이 정말로 이 행성에 존재하고 있으며,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에 반대하며, 자신들이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자신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과 모든 사람들이 맞서 싸우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상황들에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도록 만들어서, 엄청난 양의 부적격한 에너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어둠의 세력들을 먹여 살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많은 영성인들이 이러한 싸움에 휩쓸리게 됨으로써, 이들의 삶이 집단의식을 끌어올리고, 물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정말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투쟁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적인 갈등들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주된 힘이며, 이러한 투쟁들로 인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 창조자로서, 그리고 어머니 빛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상대적인 선(善)과 상대적인 악(惡) 간에 결코 끝나지 않을, 구시대적인 싸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덫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 즉 “너희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38-39)”라는 말씀 뒤에 숨겨져 있는 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의미심장한 단순한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즉 유일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왕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구상은 두 개의 상반되는 것 간의 갈등 속으로 여러분을 끌어들여, 부정적인 느낌으로 삶에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이원성적인 투쟁 속에 여러분을 더 단단하게 묶어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향 나선, 즉 블랙홀 속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상황에 신성한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anything)으로 인해, 신성한 사랑이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 흐르는 것을 차단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축복하려고 해야 하며, 그래야 그러한 것들이 가속화되어,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축복하려고 해야 하며, 그래야 이원성적인 의식을 초월하게 됨으로써, 이들도 타인들을 해치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악은 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악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과 악 사이에는 어떠한 투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반대되는 것도 인식할 수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눈은 너무 정결해서, 악과 죄를 보실 수가 없으며(하박국서 1:13)”,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무결한 개념만을 보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과 악(惡) 간의 싸움은 오로지 이원성의 세계에만 존재할 수가 있으며,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혀 있음으로써, 불난 곳에 나무를 계속 집어던져 넣는 동안에만, 계속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행성 차원의 해결책은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적인 자아들(conscious selves)을 세속적인 자아와 분리시킴으로써, 이원성적인 의식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식을 실현하게 될 때, 집단의식도 변화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진실, 즉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행성 차원의 변화에 기여하기 위해,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은 모든 것을 축복하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라는 마음자세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바랍니다. 어떤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불완전함을 강화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빛을 차별하지 않고 주고 있지 않습니다. 불완전함을 초월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빛이 조건 없이 흐르게 함으로써, 빛이 고차원적인 비전에 따라, 심지어 여러분의 외적인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비전에 따라,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빛과 사랑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분은 외적인 마음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흘러가, 본연의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은 사람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환상을 반박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빛과 사랑은 상황을 확대시켜, 그러한 상황을 그리스도의 비전에 따라 더 높이 끌어올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은 이 세상의 왕과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이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이원성적인 비전과는 언제나 아주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이 세상의 세력들에게 좌우되지 않고, 독립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방해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분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연의 자신에게 충실함으로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詩人)의 말처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바랍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진정한 열쇠, 즉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진정한 열쇠는 모든 것을 이원성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려는 성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기대감, 즉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기대감에 따라, 지속적으로 우주가 작동되도록 하려는 함정으로부터 여러분은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대감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진리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기대감들을 하나씩 죽게 해야 합니다. 어쨌든, 육화하기 전에, 여러분이 계약서에, 즉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보장해줄 거라는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있나요? 비록 세속적인 자아는 그러한 계약서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계약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여러분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주에 의해 여러분에게 현재 되돌아오고 있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보내는 것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내보내도록 만드는 이원성적인 기대감들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러한 기대감을 죽게 하고, 그리스도 마음의 고차원적인 비전을 갈구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투쟁의식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자신을 알게 되고, 물질 우주 속으로 내려온 더 큰 목적을 이해하게 될 때, 자기중심적인 기대감과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욕망들은 아주 하찮게 보일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기대감과 욕망들을 하나님의 사랑, 즉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불꽃 속으로 자연적으로 집어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바울(Paul)과 함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긴 강좌를 따라올 수 있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기대감들과 세속적인 자아의 믿음들을 버리고, 이 결정적인 시기에 지구 행성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고차원적인 비전을 갈구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지금은 세속적인 자아로부터 생겨나는 이원성적인 믿음들과 이기심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그 너머를 보고, 지구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돕기 위해, 이 시기에 자발적으로 육화한, 커다란 영적인 그룹의 일원으로서,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어떠한 욕망보다도 훨씬 더 웅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 속으로 뛰어들어, 존재의 이유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느낄 때에만, 비로소 여러분은 궁극적인 성취감, 궁극적인 풍요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길에서, 아주 진지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에 접근하게 될 때가 찾아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적은 자아(little self)가 아니라, 참된 여러분인, 보다 큰 자아(greater Self)를 중심으로, 삶에 접근하게 될 때가 찾아오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읽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결심을 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참된 여러분인, 영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궁극적으로는 오직 한 가지의 방법으로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조건 없이 생명의 강 속으로 뛰어들어, 그 강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곳으로, - 세속적인 자아의 이원성적이고, 에고 중심적인 기대감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 그 강이 여러분을 데려다 주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이 바로 마지막의 도전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모든 기대감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Garden at Gethsemane)에서의 몸부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조차도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집단의식이 지니고 있는 전체의 반-의지(anti-will)에 맞서, 즉 그리스도의 신성에 이르는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사명을 예수님께서 완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반-의지와 맞서 싸우고 계셨기 때문에, 피땀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집단적인 반-의지에 약해지게 만들었던 것은 여전히 어느 정도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던 자신의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던 반-의지였습니다. 이러한 반-의지와 한 시간을 싸우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 온전히 그리고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행성 차원에서, 반-의지로부터 예수님을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상위의 의지에게 조건 없이 내맡기는 것이었습니다. 내맡겨야 하는 상위의 의지는 외적인 존재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여러분도 그와 같이 내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자신의 신성한 계획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의지가 바로 자신의 상위 존재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맡겨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이고, 에고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로서, 진실로 여러분의 의지와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높은 의지에게 온전히 내맡길 때,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의 각인된 모든 이미지들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각인된 이미지(우상)는 생명의 강과 함께 흐르지 않는 정지된 이미지입니다. 여기에서 미세한 차이를 인식하기 바랍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른 이미지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 많은 종교인들은 부정확하지 않은 교리들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 말은 이러한 교리들이 반-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리에 오류가 없다면, 오류가 없는 교리는 절대로 변할 수가 없으며, 결코 고차원적인 이해로 대체될 수 없다고 믿는 이상, 여러분은 영적인 참된 가르침을 각인된 이미지로 바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세요. 누군가가 요동치며 흐르는 강의 정지된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강이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얼음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강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정지된 사진은 강에 대해 올바른 이미지를 결코 제공해줄 수가 없습니다. 사진은 단지 사진이 찍힌 그 순간에, 강이 어떻게 보였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입니다. 하지만 강은 앞으로 나아갔으며, 이미지는 변하게 되었습니다. 강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강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은 결코 멈춰 서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강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전해주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관련된 영적인 가르침을 전해줄 수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는 생명의 강을 체험할 때에만, 하나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강 속에 충분히 잠기고, 생명의 강과 더불어 흐르면서, 풍요로운 삶을 체험할 때에만, 그러한 생명의 강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이며, 풍요로운 삶은 아름다움과 기쁨이라는 우주의 춤 속에서 영원히 더 커지게 되며, 세속적인 자아는 이러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라는 사막을 버리고, 용기를 내서 생명의 강이라는 살아 있는 물(Living Waters) 속으로 뛰어드세요.


진정한 여러분이 하나님의 웅대한 창조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인, 참된 정체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서,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하세요. 나와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자의식이라는 지평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의식은 진실로 여러분의 자의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All)이며, 모든 것(all) 속에 존재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서, 세속적인 자아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바라며, 여러분도 전체가 될 수 있으며, 모든 속에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힘을 내서,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춤으로써,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행을 보고, 모든 생명 속에 존재하는 여러분의 아버지를 - 그들의 아버지를 -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