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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1)


한민족 상고 대륙사를 말살하기 위해
이등박문이 식민지 수탈주의 사관으로 도입한 독일의 랑케 실증사관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민족 상고대륙사를 증발시킨
황국식민사관을 고스란히 전수한 반도 식민사학의 추종자들을 부지기수로 양산해 놓았다.

대륙에 고스란히 온존해 있는 이들 동이대륙사의 실체를 국내에 처음 밝힌다.

대륙의 지나 사학자는
동이족을 지나족의 일부로 보는 해석학적 문제를 남기고 있지만
홍산문화 대문구 문화 및 용산문화 유적이 동이족의 유산이라 못박고 있다.

해방이후 국내의 강단사학은 구구한 변명과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황국 식민지 사관의 착실한 후계자들로 반도 사학으로 경도된 정저지와라는 점에서
모조리 쓸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할 개혁대상이다.


상고시절 대륙에서 반도로 밀고 들어가기 전
다양한 이름의 문화 유적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이들 다양한 이름의 "동이 제족"은
아래와 같이 눈부시고 정묘한 문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반도사학에 경도되어 정작 상고시절에 대륙에서 반도로 밀고 들어온
동이제 족의 주류와 크게 상관없는 토착 반도인의 고고학적 유물 몇개만 껴안을 줄 알고 있다.

반도 고고학이 밝혀내고 있는 이러한 반도내 고고학적 유물
가령 한탄강변 전곡리 유적지라든가
공주 석장리 유물이라든가
그 외 유사문화는 당연히 대륙내 동이 제 족의 영향을 받은 것이 대부분이고

동삼리 패총이라든가
그 외 지석묘라든가 하는 등의 구석기 시대 고고학 문화유적은
실상 대륙내 동이 제 족의 주류문화와는 별반 상관없는 변방문화의 발자취이거나
당시 그 영향권에 들어있던 변두리 문화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이헌종은 <동북아시아 중기구석기문화 연구>에서,
대륙에서 리프팅된 제 문화권의 유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베리아일대의 무스테리안기의 문화와 멀리 확산되어 있는
유라시아 석기문화와의 유사성을 어떤 바탕에 의해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스테리안 석기문화에 대한 기술체계의 특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문화군, 문화의 계통, 기술적 계통, 문화확산, 발전단계선 등이 지역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더욱이 중앙아시아와 몽고지역에도 확산되어 있는 무스테리안문화의 제 양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Okladnikov 1981,1986; Derevianko 1999).

결국 이 지역의 중기구석기문화는 다양한 무스테리안기의 석기문화
즉 유럽의 석기문화와 연관된 석기문화의 제양상과 거의 유사한 문화 계통,
기술적 전통 등을 갖고 일정한 발전단계를 밟았다.

그런데 이 지역의 남동쪽에 위치한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석기문화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주목된다 하겠다"

(계속)


(앙소문화 전기 고고학 문화 분포도)





(1번) 홍산문화

북쪽 하북성 발해만에는 동이족 환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산(紅山) 문화가 존재

(2번) 후강(后岡) 1기 문화

동쪽으로 산동반도 바로 위의 후강(后岡) 1기 문화가 존재

(4번) 대문구 문화

동이족 은나라의 유적지로 청구 배달국의 후예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족이 건설한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존재

(6번) 대계(大溪) 문화

남쪽 장강 중류의 동이족의 초나라 지역에는 대계(大溪) 문화 유적지가 존재




홍산문화(紅山文化) 주요 유적 사진 모음


(1) 여인이 앉아 있는 모습의 도기소상 일부(陶塑女坐像局部)

이 상(像)은 대략 실제 사람 크기의 3분지 1 크기이다.
받침대위에 무릎을 정좌한 자세로 공양해 받들어진 신상(神像)을 표현한 것이다.



(2) 홍산문화(紅山文化) 통형기(筒形器)

이런 종류의 통형기는 가운데 구멍이 있고 밑바닥이 없으니,
이는 단지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 적석총 위에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이는 마땅히 전적으로 적석총 매장을 위해 만들어져 설치된 특별한 종류의 그릇이다.



(3) 동북지구 신석기시대 옥기 출토 지점 분포도



(4) 백옥저룡(白玉猪龍)

대륙인의 관념 가운데, 용은 일종의 추상화된 신령(神靈)이다.
이러한 옥저룡의 출현은 홍산(紅山) 문화 거주민이 이미 용을 숭배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공예 각도의 관점에서 완상할 것 같으면 그 조형이 고박(古朴)하고 구상이 독특하고,
조각기술이 간단하고 세련되어 생동감 있으니,
이것이 홍산(紅山) 문화 옥기의 대표작이다.



(5) 옥2연패(玉二聯?)

이 옥은 마땅히 일종의 패옥 장식이다.



(6) 와구문옥 장식상(瓦溝紋玉飾)

옥기 표면을 갈아서  와구상(瓦溝狀:구는 봇도랑)의 문양장식을 드러냈으니,
옥기 표면 변두리가 빛나고 매끄럽게 했으니,
이는 홍산(紅山) 문화 옥기의 특색의 하나이다.






(운영자 주)

책상머리에 앉아 앵무새처럼 한세기를 나불거려온 OO사학자 100명보다
대륙을 두발로 누비면서 몸소 동이의 역사를 탐사한
안원전 선생님의 글 한편을 읽는 것이 우리의 참 역사를 찾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일부 문구 몇자는 운영자인 제가 추가하였습니다



(안원전 : 동이 홍산문화의 위대성)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표) 시대별, 지역별 문화 현황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이상 안원전 주 - 계속)

(앙소문화 전기 고고학 문화 분포도)





(1번) 홍산문화

북쪽 하북성 발해만에는 동이족 환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산(紅山) 문화가 존재

(2번) 후강(后岡) 1기 문화

동쪽으로 산동반도 바로 위의 후강(后岡) 1기 문화가 존재

(4번) 대문구 문화

동이족 은나라의 유적지로 청구 배달국의 후예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족이 건설한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존재

(6번) 대계(大溪) 문화

남쪽 장강 중류의 동이족의 초나라 지역에는 대계(大溪) 문화 유적지가 존재

(5번)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

양자강 하류의 전통적 동이 제 족의 웅거지에는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가 존재

(3번)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가 있는 섬서성 지역

이들 유적지 중에서 앙소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4번의 대문구 문화”와 “6번의 대계문화 유적지”이다.



(참고 : 장강(양자강) 중하류 지구 신석기 시대 중기 문화 분포도)


장강 상류인 호남성 동정호의 팽두산(彭頭山)과 동이족인 묘족(苗族)과 같은 동이족인 월족(越族)이 밀집해 웅거한 장강 하류의 절강성 상해일대(양저문화)와 샤오싱(소흥)부근의 하모도(河姆渡)에 밀집되어있음을 본다.

장강 유역은 동이 구려족과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 백월족(百越族), 동이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웅거지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문헌 중에 일찍이 원시, 낙후된 미개지 땅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곤 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출현의 고고학적인 발견은 그 출현 연대가 황하유역에 비해 늦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문화발전 수준 역시 결코 북방 동이족의 황하유역보다 낮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000년 내지 3300년 전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형상은 수공업 및 농업이 한결같이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동이족이 웅거한 상고시기의 장강 유역의 정황은 지나 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도 그 요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하모도 유적지를 가면 태양신의 유적지라 칭하는데 이는 역시 태호복희와 태양신으로 추앙되덤 염제 신농의 농경문화 덕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망을 만든 수렵문화의 복희와 농기구를 만든 염제를 두고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1) >


(그림1) 홍산(紅山)문화 중요 유적지 분포도




(그림2) 홍산(紅山)을 멀리서 본 조망도





홍산은 적봉시(赤峰市) 구(區) 북부 근교인 영금하(英金河) 동쪽 해안에 있다.
산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이 자홍색(?紅色:붉은흙 자)을 띠고 있어
홍산(紅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요하(遼河)유역의 제사(祭祀)중심)


1) 유목과 농업이 서로 만나는 홍산(紅山)문화  

홍산(紅山)문화는
동북지구의 흥륭와(興隆?) 문화와
조보구(趙寶溝) 문화를 계승 발전해 일어난 원시문화로

지금으로부터 5천년에서 6천년 사이의 문화이다.

앙소(仰韶)문화와 서로 인근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홍산문화는
정미(精美)로운 옥기(玉器) 및 대형 종교건축으로 이름을 드러냈는데,
이는 북방 앙소문화의 강하고 굳센 파트너였다.

요녕(遼寧) 서부 대능하(大凌河) 유적지에서 발굴된 지금으로부터 5 천년전의 종교유적지
- 제단(祭壇),
- 여신묘(女神廟),
- 적석총 등

이들 건축 유적지는 50평방 천M를 점유하고 있으며,
순연산(順沿山)의 산세의 좌향은
남북축의 선으로 배열되어 달려가 질서있는 산세를 조성하고 있으니,

이는 홍산문화 최고등급의 정치중심이다.

홍산문화는 이미 원시씨족취락 단계를 넘어섰으며,
다시 고 일급의 사회조직인 성방식(城邦式) 고국(古國)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조기(早期) 성방식(城邦式)의 원시국가가 이미 북방에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농업발달)

6천년전의 동북 대부분 지구의 기후는
오늘날의 요남(遼南) 혹 기북(冀北)보다 농업생산에 상당히 유리했다.

동북지구의
- 흥륭와(興隆?),
- 신락(新樂),
- 홍산(紅山),
- 부하(富河) 문화 등은 모두 농업을 주로 했다.


홍산(紅山)문화는

농업이 발달하여 생산공구 가운데는 크고
- 단단한 돌호미(石鋤),
- 돌대패(石?)가 있으며,
- 타제(打製)로 만든것과 마제(磨製)로 만든 것도 있으며,
- 또 석도(石刀)가 적지않게 있다.

유목과 어렵이 거듭 중시되어,
유적지 가운데는 돼지, 소, 양의 골격이 적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옥기(玉器)도
돼지머리형 옥장식 및 석족(石鏃), 골족(骨鏃), 창(矛) 등 수렵공구와
사슴, 노루 등의 동물골격이 발굴되었다.

도기 제조기술이 성숙해
협사도(夾砂陶)로 취사그릇을 제조했으니,
대표적인 그릇 형태는 입이 크고 배가 깊은 항아리(大口深腹罐)으로,
몸체에는 갈 “지(之)”자의 문양 장식이 많으며,
그릇 아래는 편직물의 흔적이 있다.

또 북방의 회색(灰色 혹 자색(紫色) 그림으로 제작한 도기가 적지 않게 보인다.


(그림3) 옥부엉이(玉?)와 옥조(玉鳥)





「시경(詩經)」<상송(商頌)?현조(玄鳥)>에 설명하기를

“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해 내려가 상(商)을 낳게 하다(天命玄鳥,降而生商)”,
연(燕)이 곧 현조(玄鳥)니,
고대 선주민(先民)인 동이족은 새(鳥)를 사랑해 부락 도등(圖騰:부대 상징깃발)으로 삼았다.

지금의 북경(北京) 옛 칭호는 바로 “연(燕)”이라 칭했으며,
북경 뒷 산맥을 칭해 “연산(燕山)”이라 불렀으니
이는 바로 아주 먼 옛날에 연(燕)의 자족(子族)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이 모두 동이족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
(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
(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안원전 주)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

「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 안원전 주)


(그림 4) 돼지머리형 옥패(猪首形玉?)

돼지는 당시 주요한 가축의 하나로,
사람들은 돼지를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는 배장(陪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옥장식 제조 또한 돼지를 애용해 주제로 삼았다.





(그림 5) 제비형 도기항아리(燕形陶壺)

홍산문화의 도기제조업은 상당히 성숙되어, 공예수준이 높았다.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형상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시끄럽게 짹짹거리며 어미가 먹여줄 것을 기다리는 어린 제비형상이다.

이는 실용적인 협사(夾砂) 홍도(紅陶) 물동이로 이 역시 제기(祭器)다.





<종교적 의의(意義)를 갖는 옥기(玉器)>


홍산(紅山)문화의 옥기는 특별히 그 늦은 시기의 작품이 아주 발달하여,
보통의 취락 유적지조차 정교하고 뛰어난 옥기가 출토된다.

이들 옥기는 구멍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이는 패물장식으로,  동물형상과 장식품 등 두 종류가 흔히 보인다.

홍산(紅山)문화 옥기는 제사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적 의미가 많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돼지,용의 형상, 구운형(勾云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 안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산 정상 중심에 있는 대묘(大墓)의 묘 주인 손에서 옥구(玉龜)가 쥐어진 채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씨족 구성원의 등급분화가 이미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단 수령이 이미 출현하여 옥기(玉器)가 특수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찬 조소예술)

홍산(紅山) 문화 제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동물들과 인물의 진흙 소상(塑像)이 있는데 이들은 채색그림을 그려 넣은
돼지, 용, 큰 새의 잔체(殘體) 등이다.

그 가운데,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제사 유적지 가운데는,
전신 인물 소상(塑像)이 출토되고,

우하량(牛河梁)에서 출토된 가장 큰 인물 소상(塑像)은
실재 사람의 세 배 크기에 근접하는 것으로 추산되어
그 완전한 입상(立像)은 마땅히 4-5M높이에 달한다.

이 인물상은 비록 다수가 손상되어 잔해만 남아 있지만,
건장하고 풍체좋은 허우대, 사지는, 거듭 고박(古朴)하고 조확(粗?), 순후(淳厚)한 미가 있으니,
가히 이는 대륙에서 가장 이른 인체 조형 예술품으로 추산된다.

홍산(紅山)문화의 진흙 소상(塑像)은,
말할 것 없이 인물 또는 동물로 한결같이 그 비례가 적당하여 가장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2) >



(그림 1) 우하량(牛河梁) 대형산대(大型山臺) 및 여신묘(女神廟)

우하량 유적지의 대형산대 및 여신묘는 유적지군의 중심이다.





(묘당(廟堂)에 오른 여신)


홍산(紅山) 문화의 사회는 종교가 발달한 사회로 그 출현규모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종교중심이다.

지금의 요녕(遼寧)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에서 발굴된 여신묘(女神廟)는
제단과 적석총으로 조성된 대형 종교유적지이다.

산 정상에 건축된 여신묘(女神廟)는 아주 다양한 많은 여신들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으며,
아울러 용 머리, 맹금류의 소상(塑像) 및 제사용품이 발굴되었으니,
이는 이미 신묘(神廟)의 공능(功能)을 구비하여,
신권과 왕권이 합일된 병아리 형태가 출현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런 류의 종교발전의 성숙은 통치자 권력의 결합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부계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중의 하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우하량(牛河梁) 주량북산(主梁北山) 언덕 정상에 있으며,
언덕 정상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평대(平臺)가 있다.

이곳의 지세는 높고, 좌북면남하여, 무형중에 신성한 자를 보면 위에 있어 높고 장엄하여 신성한 감각을 준다.

묘(廟) 북쪽 18미터 되는 곳에 인공으로 만든
남북 길이 175미터, 동서 길이 약 159미터의 큰 평대(平臺)가 있는데,
주위에는 돌로 겹쳐 쌓았고,
중간에는 통로와 사당을 서로 통하는 길이 있어,
성대한 종교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물 조상(造像)은 여신묘(女神廟)의 주체로 당시 받들어 공양한 신령이다.
또 루공두(鏤孔豆:루는 철장식, 두는 제기이름) 형의 그릇뚜껑은 채도 루공대기(鏤孔大器)  등 제사요품이 있다.

여신묘(女神廟)에서 출토된 인물 소상(塑像)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
공양을 받은 신이 이미 주와 버금으로 나뉘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림 2) 여신묘(女神廟) 유적지





(그림 3) 여신두상(女神頭像)





크기가 실물에 접근하는 여신의 두상은 받들어 공양하는 주신(主神)의 하나다.
황색점토로 풀, 곡식줄기로 이겨 만든다.

겉 표면은 광택제 활석으로 문지르고 안면부위는 홍색을 입히고,
입술은 붉게 칠하고,
눈은 담청색을 옥편을 넣어 눈동자로 삼는다.
이 두상의 윤곽과 전체는 모두 아름답고 양눈은 형형하고 전아(典雅)하고 고귀함을 보여주어
신비로움이 이를 데 없는 상이다.

(그림 4)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




진흙을 이겨 만든 토우상.
원시의 농업사회에 있어 사람들은 대지를 모친으로 여겼으니,
이는 만물을 번식시키고 오곡의 신을 출산하고 마침내 이를 받들어
농업의 풍년수확을 보우하기를 기원 간구했다.
또한 학자들은 이것이 선주민이 조상 선조를 제사하는 우상이라 보고 있다.


(그림 5) 여신묘(女神廟)복원도




여신묘는 주실(主室)과 단실(單室)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양자 사이는 대략 중축선(中軸線)상에 2.05미터 간격이 있다.
그 중 주실(主室)은 북쪽에 있는데,
반지혈식의 토목으로 엮은 건축으로,

남북 총길이 18.4미터, 동서 6.9미터로 평면으로는 아(亞)자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실, 서실로 말미암아 북실과 남실이 조성되어있다.

실내의 담장벽 한 부분은 붉은 색, 백색의 두 가지 색으로 그린 기하학적 회화 벽면을 하고 있다.

단실은 남쪽에 있는 부속건축으로 횡장 6미터, 최관(最寬) 2.65미터다.
여신묘(女神廟)는 총체작으로 주와 버금이 분명하여 대칭분포를 보여준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3) : 우하량(牛河梁) 유적 적석총 >



(그림 1) 대형묘장 시의도(示意圖)





(그림 2)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적석총 건축군은 북쪽으로 여신묘까지 거리가 900미터로,
5기 규모의 거대한 적석총과 1기의 적석제단이 있으며,
동서 한줄로 배열되어 총길이 160미터, 남북 50미터다.

적석총은 방(方)형과 원(圓)형이 있으며,
제단은 3층 정원(正圓)형으로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일정한 규칙을 두어 일자 배열을 하고, 일도(一道)로 구성해 장려한 경관을 보여준다.

우하량 유적지에 있는 이러한 적석총군은 한 군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하량이 당시 아주 많은 사회집단으로 말미암아 종교활동의 장소로
제사 등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
사진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원형 적석총과 왼쪽의 방(方)형 적석총이 보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을 상징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제단과 묘장(墓葬) )

원방각의 문화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다.
천원지방의 묘장은 동이족의 문화로 홍산문화는 대표적인 동이족의 문화다.

홍산문화에서는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동이족의 상징인 호시, 석촉, 실크, 옥 중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새삼 신기한 것이 아니다.

대륙을 말아먹은 동이족의 상고 문화를 감안하면
대륙 곳곳의 상고문화 유적지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가운데 별도로 눈을 번쩍 깨게 하는 유적지는 섬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한 기다.

이들은 돌로 성채와 담장을 쌓고, 돌로 묘를 쌓았으며, 돌로 정상을 북돋았다.
적석총은 네모형(방형)과 원형 2 종류가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과 합치한다.

이들 금자탑식의 높고 큰 적석총과 제단은 같지 않은 규격의 묘장이 있어 상호 유기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같은  종교성지 곳곳의 장관은 계층분화된 인상과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方形)제단은 문명시대의 서광이 뻗쳐 옴을 보여준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묘장은 규모와 부장품의 수량 등에 따라 대, 중, 소 3 종류로 나뉘어,
당시 사회조직 내에 이미 삼엄한 등급차별이 출현했음을 체현하고 있다.

대형 묘(墓)는
왕왕 적석총의 중앙부위에 자리 잡고 있고, 또 묘실면적은 크고, 부장품은 많고 좋다.

중형묘는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고,
소형 묘 역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대형과 중형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옥기(玉器) 등의 부장품이 있으며,
부장품들의 종류와 배열방식은 농후(濃厚)한 종교색채를 띠고 있다.

소형묘장의 수량은 중다(衆多)한데,
부장품으로는 옥기가 적게 보이고 있으며,
중형묘, 대형묘보다 부장품의 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하나같이 부장품이 없다.

적석총내 대묘의 주인은 사후에 홀로 적석총 중앙에 묻혔으며.
그 생전의 혁혁한 지위와 더불어 서로 저울질했으며,
중형묘의 묘주도 마땅히 당시 사회의 상층성원이었으며,

소형묘에 이르러서는 묘주의 신분이 비교적 복잡하여,
그들은 진귀한 옥저(玉猪), 옥룡(玉龍) 등의 부장품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장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지위가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신분이 한결같이 대형,중형 묘주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금자탑 형식의 등급의 묘장은 진일보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데,
홍산(紅山)문화 후기는 말할 것 없이 종교활동 또는 상장(喪葬)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속에는 계층분화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그림 3)  함께 묻은 풍부한 옥기(玉器) 부장품




우하량(牛河梁) 홍산(紅山)문화 유적지 중심
대묘(大墓) 남성 묘주인은 50 수 세. 옥기 7건을 따라 묻었다.

머리 부위에 두 줄기 큰 옥벽(玉璧) 이 놓여 있고,
또 옥환(玉環)과 옥패(玉?)가 놓여있다.
양 손에 쥔 옥 거북은 묘주인이 종교 영수(領袖)의 신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림 4) 옥저용(玉猪龍)




홍산(紅山)문화의 선주민은 오직 옥기(玉器)만을 함께 묻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玉)만을 묻은 매장의 전통은 바로 홍산(紅山)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저용(玉猪龍)을 매장한 주인공은 마땅히 신분이 비교적 높은 인물이다.


(계 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4)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


(홍산문화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 - 성자산(城子山))



(그림 1)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각좌현(?左縣) 대성자(大城子) 동남의 대릉하(大凌河) 서안의 한 산구(山丘) 고지상에 있는데
사방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그림 2) 옥거북(玉?),옥촉(玉?), 갈고리구름형 옥패(勾云形玉?)





(요하(遼河)유역의 제사 중심)


종교의 전파

홍산(紅山)문화 만기(晩期)에 종교 유적지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별도로 중소형의 제사유적지들이 있어,
규모는 우하량(牛河梁)만은 하지 못하나
단, 상호간에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제단이 유사한 제사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원방각의 동이족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단 부근에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지 특유의 유물은 제사용 진흙 채도 통형기(筒亨器) 등
특수한 도기(陶器)와 동물류 그릇, 옥벽(玉璧) 등이다.

최근 발굴된 이런 종류의 유적지는 적게는 3군데 있으며,
그 가운데 동산취(東山嘴)는 중형 유적지에 속하며,
성자산(城子山)과 호두구(胡頭溝)는 소형 유적지에 속한다.


(지모신사(地母神社)-동산취(東山嘴))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하천에 임한 대지(臺地) 상에 건립되어,  
건축은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주체로 하여 건축한 단상기지(壇狀基址)로
주위에는 겹쳐 쌓은 석괴(石塊)가 있다.

이곳에는
서로 같지 않은 시기의 유적지 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장소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돼지뼈와 사슴뼈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제사에 희생동물로 바쳐진 것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주로 채도 통형기(筒形器)와 채도 쌍복분(雙腹盆) 등 제사에 사용된 특수도자기이며,
또 쌍룡수(雙龍首) 황형(璜形:璜은 瑞玉,벽옥을 두 쪽 낸 것) 옥장식과
녹송석(綠松石)을 사용해 만든 부엉이(?)가 있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흙을 개어 만든 사람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중에 소형은 머리가 없고 발이 짧은 나체 임신부(孕婦) 입상(立像)이며,
대형인물은 흙덩어리만 약간 남아 받침에 단정히 앉은 반퇴단좌상(盤腿端坐狀)이다.

이들 소상(塑像)은 마땅히 유적지 제사의 주요대상인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성자산(城子山)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능원시(凌源市) 능북향(凌北鄕) 삼관전자(三官甸子)의
서산파(西山坡) 위에 있다.

동북으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와 약 8천미터다.

홍산(紅山)문화 선주민은
일찍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딴 곳으로 가 묘지가 되었다.

현재 유적지 서남에는
한 기의 원각방(圓角方:원각방은 동이족 고유의 특징, 천부경 참조) 형의 방 터가 있으며,

부근에는 1개 2M로 보이는 사각형(方形)의 석퇴(石堆:언덕)가 있는데,
석장(石牆:돌담장)과 더불어 서로 연관이 있다.
석퇴(石堆:언덕)와 멀지 않은 곳에 일단의 쇄석대(碎石帶)가 있으며,
위에는 파쇄된 밑바닥 없는 통형기(筒形器)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성자산(城子山)의 홍산(紅山)문화 묘장(墓葬)은 공히 3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토광(土壙:흙구덩이) 석곽묘(石槨墓)로,
그 중에서 한 기의 묘갱의 혈(穴)은 비교적 크며,

부장품은
갈고리 구름형 옥장식, 말발굽형 옥고(玉?:그릇 둘레의 테), 옥조(玉鳥), 옥월(玉鉞:도끼)과
죽절상(竹節狀) 옥장식 안에 9건의 옥기(玉器)가 있으니,
묘주(墓主)의 신분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명의 정체는?
글쓴이: 수 향 번호 : 7조회수 : 582007.06.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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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고조선)의 문명을 지나인들은 홍산문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중국의 요녕지역에서 홍산문명(紅山文明)이 새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은 화하족(지나)의 문명과는 전혀 다르고 한(韓)민족의 문명과 일치하고 있어 한민족문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발견과  파장



황하문명보다 고대국가를 먼저 형성시킨 문명이 내몽고의 요녕에서 발견되었는데 발해만 북쪽에서 신석기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할 문명이 홍산문명입니다.

 

이 문명의 발견으로 대륙은 황하중심 문명전파론을 철회하고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했고 산동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가 바로 이 홍산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명이 바로 한(韓)민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중심지로 인정되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한국학계의 일부에서도 홍산문명을 보고 고조선이 실제로 BC.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명은 또한 강단사학계를 '반도중심의 식민사관'이라 비판했던 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산에서 황하보다 먼저 고대국가를 형성한 유적으로 성곽과 왕궁터가 발견되므로 고조선의 건국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이 바로 홍산문명(BC.4500~ 2500)이고 이 홍산문명은 흥륭와문화, 신락문화(BC.6000~ 5000)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문명은 요녕지역과 내몽고 동부지역에 넓게 전개된 BC.4,000년의 신석기-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되며 사해문화와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 되었고 그 후에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며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영역을 문헌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지역 그리고 양자강 하류지역인데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유적은 북신문화이고 BC.5000년까지 소급되며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BC.4500년경에 이 지역에 있었던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결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동이계(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문명의 특징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의 장례의식은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홍산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인데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석관묘- 돌널무덤

*적석총- 돌무지무덤  

 

반면에 중국의 화하족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였고 주(周)나라시대에 들어서 나무로 관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에서 홍산문명과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명은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을 이용해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백제에도 계속해서 계승되는 한(韓)민족 고유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홍산이란 단어는 지역이름인데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헌원과 전쟁을 했던 치우의 근거지로 지적이 되는 곳 입니다.



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남, 산서와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홍산문명 이후 하가점-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광범하게 확산되는데 홍산문명은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문화는 주신(고조선)의 문화입니다.

 

홍산문명은 소하연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되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공식화 되었습니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BC.2400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유적이 발굴되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도 발굴되어 BC. 2333년에 고조선의 건국이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유물보다 연대가 앞서며 대륙의 동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문명이 갖는 큰 의미  



















홍산문명의 발견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히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대륙의 앙소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와 용산으로 보았는데 홍산문명을 발견한 후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명을 듭니다.  











다시 말하면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므로 한(韓)민족의 선조들이 화하족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하북, 산동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문화, 대문구-용산문화, 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와문화, 신락문화, 홍산문명,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韓)민족 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습니다.  다만 양식있는 중국학자의 일부가 개인적으로 고조선(古朝鮮-辰國)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고백 하고 있을 뿐입니다.

 

홍산문명은 고조선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이고 그 당시에 화하족은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지 못했으므로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고 그 동이족이 고조선임은 너무도 명확한 실사입니다.

 

현재 한국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에서 요서,요동의 요녕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한(韓)민족의 기원도 요녕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중국의 화하족문화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홍산문명의 주인공은 동이족이 됩니다.

 

이 홍산문명을 만든 사람들이 바로,우리 한민족의 선조분들로써 위대한 세계적 대제국 주신을 건국했던 분들 입니다.




 

출처 : 한민족 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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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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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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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우주 우리가 지금 이곳 지구에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트만 2015-08-17 12719
공지 한민족 정치포탈 서프라이즈 - 제정신 가지고 사는 이들이 모인곳 아트만 2014-07-12 26476
공지 한민족 뉴스타파 - 시민의 회비로 운영되는 / 믿을 수 있는 언론 아트만 2014-07-12 14422
공지 지구 한민족의 맥에 올려지는 현실 정보에 대하여 아트만 2013-08-03 24141
61 한민족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책에서 지적한 황충(누리)떼와 메뚜기의 차이점, 그리고 구성(九姓)의 의문점에 대해서!!! [44] 조강래 2008-01-19 4521
60 한민족 병마용갱은 진시황 유물인가? 조강래 2008-01-17 5784
59 한민족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1] 조강래 2008-01-15 4416
58 한민족 북한의 대륙조선과 일본의 대동아공영, 대격돌 임박했다 ! [2] [93] 조강래 2008-01-14 6639
57 한민족 조선의 중심이 중국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5 : 조강래 2008-01-13 4102
» 한민족 중국의 황하문명 보다 앞선 동이의 홍산문화 [76] 조강래 2008-01-12 5282
55 한민족 신라의 발칸포인 쇠뇌노 (포노砲弩)와 나침판인 신라침판 조강래 2008-01-11 4945
54 한민족 고려의 남쪽에 명나라가 이웃해 있다 조강래 2008-01-10 3876
53 한민족 고대 대인들과 군자들의 땅-한반도 조강래 2008-01-09 4299
52 한민족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조강래 2008-01-08 4956
51 한민족 카스라-테프트밀약과 미.일군사동맹에 숨겨진 침략적 본능!!! | 조강래 2008-01-07 4830
50 우주 블랙홀 오성구 2008-01-07 5434
49 한민족 고려가 사천성인 촉(蜀) 지방을 평정하다 [2] 조강래 2008-01-06 4292
48 한민족 경기도에 좌도와 우도가 있었다. 조강래 2008-01-05 4818
47 한민족 한반도에 웬 만리장성 ? 조강래 2008-01-04 4822
46 한민족 조선에는 사막이 끝이 없다 !! ?? 조강래 2008-01-03 4679
45 한민족 광화문 조강래 2008-01-02 4232
44 한민족 덕수궁 조강래 2008-01-01 4017
43 한민족 조선의 황궁 [1] 조강래 2007-12-31 4694
42 한민족 훈족은 한민족의 갈래 조강래 2007-12-30 4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