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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조선의 중심이  중국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5 :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다.


고려를 중심으로 하여 지난날에는

그 남쪽에 명나라가

이웃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
오늘은 아예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었다는 사례를 들어본다.



이런 사례를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조선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생각하면

그 지리적 위치가

머리에 윤곽으로 잡힐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정체성을

칼로 무우 자르듯이

밝힌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다파나국이 한반도와

그 북쪽지역의 국가였다는 것도

하나의 가설로 내세웠을 뿐이다.

한반도의 정체성을 발히는 것은

조선의 정체성을 밝히면

자연스레 나올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다음의 사례를 잘 읽어보자.

물론 이 글은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

(집문당, 2003)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원문]


遣前大司成鄭夢周 報聘于日本 且請禁賊

書曰 竊念本國 北連大元 西接大明

常鍊軍官以充 守禦 於海寇

只令沿海州郡 把截防禦賊徒偵候 … 

厚意其益圖之.



[번역]
전 대사성(前大司成) 정몽주(鄭夢周)를

일본에 보내어 답례하고,

또 왜구를 금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에 '생각컨대 우리 나라(고려)는

북쪽으로 원나라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 명나라와 붙어있어

항상 군관들을 훈련하여

수비 방어를 담당시키고 있으며,

해적에 대하여서는 다만

연해의 주·군에 명령하여

방어하게 했었다.…

앞으로 잘 조처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해설]


여기 이 내용은《고려사절요》에서는

정몽주를 일본에 보냈다는 말만 적혀있지만,

《고려사》에는 고려·북원·명나라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놓았다.



즉 분명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다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고려의 남쪽에

명나라가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반도의 서쪽에 붙어있는 곳에는

물고기가 사는 황해(黃海) 바다일 뿐이다.
더구나《中國歷史地理》

(중국역사지리: 石璋呂,

臺灣: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의

"섬서(陝西)편에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욕심을 내었으나,

국세(國勢)가 부진(不盡)하여

실현하지 못했다.'라고 했다."는

기록에서 명나라의 강역의 한계가

동쪽으로 사천성 동쪽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었다.
이런 기록을 종합하면,

결국 명나라의 강역은

촉지방인 사천성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뻗쳐 있으므로,



고려의 중심지 서울

개봉(開封: 開京)과 서경(西京)이요

서도(石)라는 장안(長安) 쪽에서 보면,

명나라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서쪽과 남쪽이라는 말이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1370년(공민왕 19, 명 태조 3) 6월 신사일에

"황제는 또 시의사인(侍儀舍人)

복겸(卜謙)을 보내어 와서

과거(科擧)보는 절차[程式]를 공포하였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

홍무 3년(1370) 8월에

비로소 특별히 과거를 설치하여,

재덕(才德)이 겸비한 선비를 등용할 것인 바,

…향시(鄕試)를 각 성(省)과 직예(直隸)의

부주(府州) 등처에서는

500명을 뽑아서 거느린다.



그러나 인재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은

규정된 수에 구애하지 않으며,

만약 인재가 모자라  

규정된 수에 차지 않으면

실제 정형 대로 공(貢)에 충당할 것이다.


등용할 인원은 하남성(河南省) 40명,

산동성(山東省) 40명, 산서성(山西省) 40명,

협서성(陜西省: 섬서성) 40명, 북평성(北平省) 40명,

복건성(福建省) 30명, 강서성(江西省) 40명,

절강성(浙江省) 40명, 호광성(湖廣省) 40명,

광동성(廣東省) 25명, 광서성(廣西省) 25명이다

나머지는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직예성의 부주(府州) 100명으로

향시(鄕試)에서 뽑는다.




회시(會試)의 정원은

100명으로 하며, 고려(高麗)·안남(安南)·

점성(占城) 등의 나라에서는

만일 경서(經書)에 밝고,

몸가짐이 바른 선비가 있으면,



각각 그 나라에서 향시를 실시하되,

서울[경사(京師)]로 올려 보내어

회시에 응하게 하는 바,


규정 인원수에는 상관없이 뽑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11개

성(省)에 400명에 이른다.




특별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면서

이 11개 성의 선발 인원수를

밝힌 것으로 볼 때,

이 지역이 고려의 직할 강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실제 고려가 당당하게

존재하였기 때문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겨우 3년째 되는 해에 방대한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는 규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조치는

고려라야 만이 가능한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9개 성(省) 가운데서

2개 성(省) 강소성·안휘성은

다른 곳과는 달리 지금

중국의 동쪽인 바닷가에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당시에 왜(倭)의

지역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나머지 7개 성(省) 사천성·운남성·귀주성·

감숙성·녕하성·청해성·신강성은

동경 110 의 서쪽인

지금 중국의 서부 지역이다.

마침 주원장이 사천성에서

명나라를 세웠던 지역의

남쪽과 북쪽에 해당된다.

여기서 과거(科擧)의 선발 인원수를

밝히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명나라가 직접 관장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곧 이 지역이 명나라의 강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머지 7개의 성(省) 지역이

명(明)나라라고 보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이

"례부주사(禮部主事)

륙옹(陸 )이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환송하는

시의 머릿글"에서 알 수있다



"엎드려 공손히 생각해보니,

천자의 총명함[황명(皇明)]이 서융(西戎)의

한 지역에 있는 나라까지

해내(海內)·해외(海外)로 뻗쳐

신하라 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덕망이 높으신 천자께서 한량없는 귀중한

력서(曆書)와 복물(服物)을 물려받고,

덕을 닦아 전쟁을 평정하여

온통 어진 마음으로 대우하였다.













그래서 1400년 11월 15일에

례부주사 륙옹(陸 )과

부사(副使)로 홍려행인(鴻 行人)

림사영(林士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니, 력서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1401년 2월 6일에는 임금들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문 밖까지 나가 맞이하였는데,











의장(儀仗)이 좌우로 늘어서고,

북과 나팔수가 앞에 서서

궁중으로 인도하니,

(사신들이) 절하고 일어나 춤추며

만세 삼창으로 예의를 매우 삼갔으니,





이는 천자의 명령을

조심성 있게 받드는 때문이다. …













내가 생각해보니,

우리 동방이 기자(箕子)가

팔조(八條)의 교(敎)를 시행한 때부터

풍속이 염치(廉恥)를 숭상하고,





중국(中國)을 높일 줄 알아서

대대로 사대(事大)하는

례의(禮義)를 가르쳐왔는데,











우리 조선에 와서

더욱 충성하고 순종하니,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조서로 타이르기를 간절히 하며,

상금 내리는 것이

겹겹이 쌓였으니,

은혜가 지극히 중하였다."고 했다.












변계량이 쓴 원문에

"欽惟 皇明"(흠유황명)에서

"皇明"(황명)이란 대개

"명(明)나라"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欽惟皇上"(흠유황상)과

같은 의미로서

"천자의 총명함" 또는

"큰 명덕(明德)"의 뜻으로

"천자(天子)"를 가리키며,

"上"(상) 자체가 천자를 가리킨다.










이 내용을『태종대왕실록』에 보면,

1401년[태종 1, 건문(建文) 3]

2월 6일의 첫머리에는

"중국의 사신"이 아니라,

그저 "조정의 사신"일 뿐이다.

이것은 "변방의 작은 나라

[명(明)]의 조정"이라는 뜻이다.










이런 덕치(德治)에 감화된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제2대 정종(定宗)의

천자즉위(天子卽位)에

사신들을 보내왔던 것이며,

명나라의 사신들이

조서를 가져와 천자 정종에게

만세삼창을 외쳤던 것이다.












"조정의 사신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옹(陸 )·홍려

행인(鴻 行人) 림사영(林士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니,

산붕(山棚)·결채(結綵)·

나례(儺禮)를 베풀었다.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성밖에서 마중하여

의정부(議政府)에 이르렀다.

이 때 수창궁(壽昌宮)이 불탔는데,

이는 시좌전(時坐殿)이

좁았기 때문이었다고 조서를 전했다.





이에 하늘을 받들고

선왕의 업을 이어받은 황제는

조서에 이르기를,

'중국의 바깥, 천지와 사방 안에

무릇 땅덩이를 가진 나라는

반드시 인민이 있고, 인민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이 있어 통치한다.



땅이 있는 나라는

대개 수로 헤아릴 수 없으나,

오직 시서(詩書)를

익히고 예의를 알아서,

능히 중국의 교화를 사모한 연후에야

중국에 조공(朝貢)하고,

후세에 일컫는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나라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또 혹은

큰 나라를 섬기지 못하여

착하지 못한 것으로

사방에 알려지는 자도 있다.


생각건대 이와 같이 조선은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익혀서,

본래 배우기를 좋아하고 의(義)를

사모하는 것으로 중국에 알려졌고,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만방(萬邦)을 무림(撫臨)하니 모두들

신(臣)이라 일컫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혹시라도 게으르고 방자한 일이 없었고,

짐(朕)이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를

공경히 받아 비로소

큰공을 이어받았으니,

곧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하례하였다.

그때에 짐이 양음(諒陰:

임금의 상중)에 있었으므로

겨를이 없어 회답하지 못하였다.

상복을 벗을 즈음에 마침 북번(北藩)의

종실(宗室)이 시끄러워

전쟁[軍旅]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회수(懷綏)의 도(道)가

이제까지도 모자랐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처럼

권지국사(權知國事: 임시 임금)

리경(李 : 李芳果, 전날 정종 임금)은 능히

사대(事大)의 례(禮)를

두터이 하여 짐의 생일을 맞아

다시 공물을 베풀었으니,

마음씀씀이 아름답게 여겼다.


이제 사신(使臣)을 보내서

건문(建文) 3년(1401)의

대통력(大統曆) 1권과

문기(文綺)·사라(紗羅)

40필을 내려 지극한 뜻에 답한다

이와 같이 천도를 순(順)히 받들고

번의(藩儀)를 공손히 지키어,

간사한 것에 현혹하지 말고,

거짓에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충순(忠順)을 굳게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보전하여,

후세로 하여금 <인현(仁賢)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빛이 난다.>고 말하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이에 조서(詔書)로 보이니,

마땅히 짐의 권회(眷懷)하는 바를

몸받으라.'고 하였다.



읽기를 마치니,

임금이 명령을 받고,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였다.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으로 가니,

임금이 태평관에 이르러

위안(慰安)하고 궁(宮)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명나라 주원장으로 볼 수 있지만,

조선의 리성계이다. 태조고황제는

1398년 윤5월에 죽었는데, 그가 조상하고

하례를 어찌할 수가 있겠으며,

명나라 혜제(惠帝)라면, 그는 상주(喪主)인데,

남들이 하는 행위처럼

조상하고 하례를 할 수가 있겠는가?


고황제는 오직 태조 리성계일 뿐이다.
이 내용에서 권지국사

리경(리방과: 정종)의 행위로 보아

이 중국조정은 중앙조정이요,

상왕·태상왕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1401년에

대통력(大統曆)을 내렸다는 말은

그 때에 정종 리방과가 태종 리방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말이다.



대통력은 귀중한 력서(曆書)와

복물(服物)로 임금·황제의 상징물이다.
또 고려·안남(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지역)·

점성(참바왕국: 베트남 남부) 지역은

별도로 언급된 것을 볼 때
고려가 이 자리에 들어갈 성격이 아니며,

나머지는 별도로 취급되는

기미국(羈 國) - 위성국가(衛星國家)였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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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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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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