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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북핵 문제, 김일성의 계획 (1950~1993)[편집]



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핵보유를 준비해왔다. 북이 최초로 핵보유를 생각했으리라고 추정되는 시점은 6.25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11월 30일에 트루먼은 “한반도에서 공산군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기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맥아더가 만주 투폭을 건의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북은 미국의 핵사용 위협을 공갈로 규정하고 핵위협의 부당성을 성토했다. 이때 북의 지도부가 느꼈던 핵에 대한 공포는 자위를 위한 핵보유를 추동한 최초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4년 인민무력부 산하에 핵무기 방위부대를 설치한 것은 북이 느꼈던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휴전 후에도 미국은 1955년 1월 2일 래드포드 합창의장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 언급,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전술핵 사용 가능 언급 등을 통해 북의 공포를 계속 자극했다. 그리고 55년에는 장거리 원자로켓을 한반도에 배치한다고 발표하고 실제로 전술핵을 배치한다. 북은 55년 4월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56년에는 소련과 핵연구 협정, 원자력 협정을 체결한다. 당연히 표면적으로 내세운 목적은 평화적 이용이었다.
해방 당시에 가장 열렬히 소련에게 충성을 다했던 김일성을 반소 주체 노선으로 선회하게 만든 사건은 1962년에 있었다.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다. 미국과 협상하여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북은 소련이 자신들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주지는 않을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후에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여 자주국방을 도모했고 주체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자주국방의 수단으로 핵보유가 추진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닉슨의 방중으로 인한 데탕트 분위기와 미 7사단 철수로 안보적 위기감을 느끼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시도했던 박정희의 경우와 완전히 같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무려 1955년, 즉 휴전협정 직후부터 소련에 핵물리학도를 유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1962년 11월 2일 북은 영변에 (공식적으로는 '영변 가구 공장'으로 알려진) 핵 연구 단지를 조성했고, 63년 6월에는 소련으로부터 2MW급 연구용 원자로 IRT-2000을 도입해서 67년부터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73년에는 대학에 핵연구 관련 학과들을 신설했다. 76년에는 이집트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도입하는데 이 시점에서는 명백히 북에게 자체 핵무장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김일성은 연설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북은 역설계 방식으로 84년에는 자체 기술로 만든 스커드 B의 시험발사를 성공한다. 86년에는 사거리 500km의 스커드 C 발사실험을 성공시킨다. 78년에는 북한 전역에서 우라늄 탐사가 실시되었고 80년에는 영변 5MW 원자로의, 85년에는 50MW 원자로의 건설을 착수했고 440MW급 소련형 VVER 경수로 원전도입을 추진했다. 플루토늄 추출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에 이루어졌으리라고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요구로 85년에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미국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한 데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핵안전협정 서명을 고의로 지연시켰으나, 1992년에야 핵안전협정 서명이 이루어졌다. 허나 NPT 가입마저 소련으로부터 핵개발과 군사,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판단했던 사실이 기밀해제된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1989년 9월 15일 프랑스 상업 위성 SPOT 2호에 의해 북의 비밀 핵시설이 촬영, 공개되면서 북핵 문제가 마침내 수면 위로 부상한다. 89년 전후 시기는 동구권 국가들이 무너지고 몰타 선언 이후 냉전이 종식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중소가 사회주의에서 이탈하여 자본주의 진영과의 화해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북한도 선택을 해야만 했다. 반미 자주노선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우던 북한에게 화해란 곧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의미했고 이는 통치기반의 약화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다. 자신을 모방했던 차우세스쿠의 비참한 말로, 독일의 흡수통일을 보면서 당연히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을 김일성의 선택은 쇄국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후견국이 없는 상황에서 안전보장을 위한 대책은 핵보유뿐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북은 국제사회에 핵을 보유할 것이라고 윽박지르며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한다. 90년 3월 김영남의 발언은 그 시작이었다. 사마귀가 적을 만났을 때 날개를 펴고 크게 보이려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걸프전에서 미군은 이라크가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IAEA는 사찰을 했음에도 이를 놓쳤고 만회하기 위해 북에 대한 강력한 사찰을 추진했고, 북은 주한미군의 핵보유를 이유로 안전협정 서명을 한사코 거부했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은 1991년 공군용을 제외한 모든 전술핵을 폐기하고 전략핵의 현대화 계획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동북아의 안보상황에도 중대한 변화가 초래됐다. 미국은 9월부터 한국에서 핵무기를 철수시켰고 사찰을 수용할 시 팀 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기로 약속했으며, 노태우 대통령도 12월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했다. 북은 제안을 수용하여 12월 31일 한국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 후 1992년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IAEA 사찰을 수용했다. 사찰은 92년 5월 25일부터 93년 2월 6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그러나 92년 7월 2차 사찰에서 북이 제출한 보고서에 적힌 플루토늄 양과 실제 양이 불일치했고, 16개 핵시설 외에 핵시설 의심지역 2개가 발견되어 양자는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IAEA는 미국 CIA로부터 첩보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넘겨받아 영변의 2개 시설이 핵폐기물 저장장소로 의심되어 사찰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북한은 IAEA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단체라 하여 강력히 맹비난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북측은 핵문제가 불거진 게 미국 펜타곤 및 CIA 등 강경파들이 위성첩보 사진 등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IAEA를 부추겨 '북한 죽이기'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고 IAEA 핵사찰을 강제하기 위해 1992년에 중단된 팀 스피릿 한미합동훈련을 1993년부터 재개토록 하는 등으로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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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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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핵위기와 김일성의 사망 (1993~1994)[편집]

3.2.1. 진행[편집]

1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던 1993년은 북미 모두에게 정권 교체의 시기였다. 양쪽의 지도자인 클린턴과 김정일은 집권 초기에 나약한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기 위하여 강경정책을 고수했다. 북방정책을 펴던 노태우와 차별화를 시도하던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미신고시설 사찰 거부를 고집하던 북에 대응해 한미는 93년 초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선언했다. 결국 계약 사안이 아닌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한 북한은 스스로 신의성실 원칙을 어긴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3월 8일에 팀 스피릿 훈련에 대응해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반기 들어서는 전군 삭발령까지 내렸다.

북의 폭거에 대해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 김영삼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송하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도 북이 벼랑끝 전술을 멈추지 않자 “핵무기를 가진 나라와 악수할 수는 없다”라며 비난하며 강경정책을 고수한다. 미국은 93년 2차례 북미회담을 통해 NPT탈퇴 유보, 흑연감속로 포기를 대가로 한 경수로 건설을 요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1년 반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한-미 내부 역시 북핵문제를 둘러싸며 강온론이 교차했고, 어느 쪽이 장악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수시로 변했다.

초기엔 강경론이 득세했는데, 미국측은 펜타곤 및 CIA가, 한국측은 안기부 및 국방부가 각각 주도했다. 한-미 양국 강경파들은 군사적 수단으로 북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보수언론도 이에 가담해 대북 군사제재가 현실화될 듯했다. 1993년 12월 들어 미국 언론에선 핵문제를 비중 있게 보도했는데, NBC 측은 한 군사전문가의 말을 빌려 북한의 전군 삭발령을 두고 '전략적 실수'라 하는 한편, 위생 문제로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동월 14일 <월스트리트 저널>도 당시 성행하던 쌀개방 반대 시위를 지목하며 "이건 북한의 위협을 표명하러 온 게 아니라 쌀개방 반대하러 온 거다"라고 비꼬는 논조가 나왔다.[13] 1994년 2월 15일에 경향신문 등 일부 언론은 외신을 이용해 <북한 이미 핵실험>이란 오보를 내 '일단 키우기' 식으로 위기감을 고조시키기 시작했다.[14]

1994년 2월에 북미는 핵사찰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에 이르나, 그러나 북이 IAEA 사찰에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는데 이어 제8차 남북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단장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면서 긴장이 급속도로 고조되었으며, 청와대가 '협상 비공개' 관례를 깨고 협상 비디오테이프를 각 방송사에 보내 보도토록 하면서 위기감이 더욱 고조됐다. 뒤이어 보수 유력언론들도 대북강경책을 펴라고 촉구하자, 정부는 4월 15일 남북특사 협상을 포기했다. 그러나 두달 전만 해도 언론이 북미회담 조건으로 특사 파견을 촉구했던 점으로 보아 통일정책이 언론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5월 13일 <워싱턴 포스트> 지는 펜타곤이 당년도 여름 북핵위기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시 전술핵무기 및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전면전을 가능성을 검토했다고 보도했다.[15] 3년 전 이종구 국방부장관이 '엔테베식 기습공격'을 운운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벼랑끝 전술을 고집했는데, 이들은 핵사찰 수용 시 미국이 화학무기 의혹, 미사일 문제, 인권시비, 테러리즘 포기 등 문제를 제기하며 '북한 고사 전략'을 계속할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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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은 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KBSMBC조선일보,또한 당시 김정일은 "북한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북한이 망하면 세계와 함께 자폭하겠다는" 극언을 내뱉었다고 황장엽은 증언하였다. 또한 당시 북한 당국에서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미국에 포탄하나 떨어진적 없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다르다"라며 "미국에도 북한군이 상륙할 수 있다"라고 주민들에게 선동하고 있다며 증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경향신문한겨레)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을 탈북한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KBSMBC조선일보경향신문 동아일보)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었으나,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경향신문1KBSMBC경향신문2)

당시 회견에 대해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MBC조선일보동아일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KBSMBC)


베릭

2022.05.22
02: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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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사용하려 할 경우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며 강력 경고했다.(KBSMBC)

미국은 한국에 패트리어트를 배치하고 북은 연료봉 인출 작업을 강행하니 미 정치권에서는 선제공격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도 "한반도에 재래식 전쟁 발생 시 미군 8~10만 명 전사를 포함해 1백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경제적 피해만 1조 달러에 이를 수 있다" 고 하여 군사적 굴복에 반대하며 온건 입장을 피력했다. [16]하지만 클린턴의 자서전에 의하면 전면전 수행 시 입을 미국의 막대한 인명피해 때문에 클린턴은 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보도했던 영변 폭격 계획은 이미 이루어진 결정이 아니라 유사시를 가정한 사전대책이었다. 이러한 전쟁 위기 상황 속에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남북 양측이 북한의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비핵화와 남침야욕 포기 등을 골자로 한 포괄적 타결안을 제시했고, 5월 12일엔 미국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 오찬 겸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지미 카터 같은 원로 정치인을 북한에 보낸다면 김일성 북한 주석으로부터 중대한 대미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클린턴 대통령에게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원로 정치인을 북한과 중국에 특사로 보낼 걸 제안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제안을 수용해 6월 15일 카터를 북에 특사로 보냈으나, 이 시점에선 안심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페리의 증언과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의 1997년 3월 강연내용 등을 종합하면 카터-김일성 회담 중이었던 6월 16일 당시 영변 핵시설 정밀타격 시나리오를 클린턴이 결정해야 했는데, 결정을 앞두고 럭 주한미군사령관과 레이니 대사가 군속 등을 본국으로 대피시키고자 했다. 타격 결정 1시간 전에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가 김일성과 북미대화와 영변 원자로 재처리 중단에 합의했다고 전화를 받으면서 공격은 무산되었다. 핵담당 대사였던 김삼훈에 의하면 북의 회담복귀에는 유엔 동시 가입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카터의 방북은 국가적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에게 회담 복귀의 명분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지대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때 남북정상회담 제안이 수락되었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불발되고 말았다.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미회담은 계속되어 94년 10월 21일에 북미 제네바 합의까지 이르러서 기본합의문이 채택된다. #



베릭

2022.05.22
02: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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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측의 상황[편집]

반면 한국 정부는 전쟁위기 해소 상황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한국측은 북한을 국제사회로 불러내려는 노력 대신 미국 강경파에 동조하려는 태도만 마냥 고수했다. 온건 대북정책을 피력하려던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1년여 전 <월간조선> 등 보수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아 해임됐고, 온건 인사는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유일했다. 또 카터의 방북에 대해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고깝게 봤는데, 카터에게 "대통령 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인물"이라며 "북한의 선전에 놀아날지도 모른다"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이건 정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거라고도 하지만, 카터 방북을 주장한 김대중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숨어 있었다.

한국 내에서 북핵위기가 고조된 건 보수 유력언론도 큰 역할을 했는데, 1994년 4월 '서울 불바다' 외에도 6월 한 달 동안 두드러졌다. 이들은 남북 군사력을 비교하는 도표와 군대 이동을 표시하는 지도를 게재해가며 미국 언론의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를 열성적으로 보도했으며, 한국자유총연맹 등 호국/안보 관련 단체나 일선 학교들도 '반공 글짓기'를 다시 하는가 하면 서울 도심에는 멸공차량이 질주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등 유력 보수언론들은 당시 국민들의 평온한 상황을 '안보 불감증'이라 몰아붙이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는데, <조선일보>는 6월 8일자 사설 '문민과 군사안보'에서 북핵위기 속 태평무드가 외국인들에게 의아스럽게 보인다며 '안보 불감증'을 지적했고, 동월 10일 사설 '대비하는 국민이라야'에서 정부에 유사시 행동대책을 빨리 만들라고 촉구하는 등 얼른 대책을 마련하라고 압력을 넣자 내무부는 15일 민방위 훈련을 앞두고 부랴부랴 국민들에게 방독면을 자체 구입하라는 공문을 전국에 뿌린 후, '전시국민행동요령 수정판'을 만들기 시작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코자 했으나, 언론의 주문대로 했다가 혼란이 생길까봐 계획 일부를 축소하고 언론의 보도 자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국민들은 정부와 언론의 요구를 믿고 슈퍼나 백화점 등지까지 줄지어 생필품 비축에 나섰고, 주식까지 내다 팔면서 주가 폭락이 이어졌다. 그러나 언론들은 국민들의 생필품 비축을 오히려 '사재기'라고 황당한 비판을 했다. 위와 같은 '안보 불감증' 키우기 일변도에 비판 여론이 일부 있었는데, 1994년 6월 18일 <문화일보>는 사회부로 전화를 건 어느 50대 주부의 항의 전화내용을 게재해 비판을 하는가 하면, 김영삼에게 호의를 표했던 리영희 교수조차 <사회평론 길> 동년 7월호 인터뷰에서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이 극우 강경적이라며 비난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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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5 "5·18 집단발포 전 무전으로 승인 요청"..최고 윗선 개입 조사 ㅡ북한 특수군 개입설은 허구 [1] 베릭 2022-05-21 866
16254 '푸른 눈의 목격자' 미국인 돌린저, 5.18 회고록 발간 ㅡ전두환 헬기 사격 계엄군의 총격 /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어떻게 헬리콥터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 총을 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구타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총검으로 죽이고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할 수 있나? 그런 게 정당방위인가?” [2] 베릭 2022-05-21 1097
16253 5.18 광주역 발포 "현장지휘 있었다" 증언..북한 특수군은 없었다 [8] 베릭 2022-05-21 1510
16252 광주의 5 18 진실ㅡ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2] 베릭 2022-05-21 1026
16251 부산대·질병관리청, 천연두 백신 패치 개발 성공 ㅡ마이크로니들(미세바늘)이피부에 녹아들어가는 원리로 파스같이 붙였다 뗌 [1] 베릭 2022-05-21 968
16250 마이크로니들(미세바늘)들을 이용한 양자 점 문신 + 신체활동 데이터 사용할 암호화폐(가상화폐)에 대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특허 [1] 베릭 2022-05-21 786
16249 소아랑TV : 팬데믹 시즌2가 온다 [1] 베릭 2022-05-20 979
16248 이제 진짜 도륙이 시작될 수도 [13] 베릭 2022-05-20 822
16247 우크라이나 군부는 투항 그러나 젤린스키는 이를 무마하려는듯 아트만 2022-05-17 713
16246 생강 마늘 야채 쥬스 ㅡ혈액속 독소를 청소해서 면역체계를 강화시는 음식 [3] 베릭 2022-05-17 774
16245 해독 ㅡ빠지는데 한달 걸린다고 합니다 [13] 베릭 2022-05-17 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