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이야기 수행 이야기] 화친공주 - 문화의 교류


탄거봉진: 화친공주 


작자: 소련(小蓮) 


[정견망] 중국 5천년 문명 역사 중 ‘화친(和親)’ 현상은 때때로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화친공주 명단을 한 무더기 찾을 수 있다. 비교적 사람들이 잘 아는 것이 바로 왕소군(王昭君)이 흉노로 시집간 것과(여기서 공주라 함은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며 엄밀히 말해 소군은 궁녀였다) 문성(文成)공주가 티베트(토번)으로 시집간 일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몇 명 화친공주의 윤회이야기를 말해보자. 이 몇 명 화친공주의 신상에서 우리는 화친이 두 나라의 평화와 문화 교류를 촉진한 것만 아니라 더욱 깊은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연을 맺는 것인데 오늘날 사람들이 이때 대법진상을 알도록 하기 위해 역사상 문화와 인연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여기서는 세 여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녀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그녀들의 이름을 소미(小美), 소남(小南), 소북(小北)으로 부르기로 하자. 


그녀들은 천상에서 본래 한 경지 중의 한그루의 큰 신수(神樹-나무), 한 마리의 천조(天鳥-새)와 한 송이의 신화(神花-꽃)였다. 천계(天界)의 모든 것은 극히 아름답고 신성하며 또 다채롭고 변화가 있다. 이들로 말하자면 함께 지내는 것에 매우 깊은 뜻이 있다. 그 신수로 말하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순식간에 나뭇잎을 번성하게 할 수 있으며 또 순식간에 가지만 남아있게 할 수 있다. 또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서 있을 수 있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도 있다. 


그 새는 클 때는 날개를 펴면 하늘을 가릴 수 있고 작을 때는 개미만하게 변할 수도 있다. 현란하게 다채로운 색으로 변할 수도 있고 한 가지 색으로도 변할 수 있다. 꽃은 더욱 천만가지 자태로 변하는데 만 가지나 된다. 꽃잎처럼 떠다닐 수 있으며 한 송이 혹은 몇 송이로 변할 수 있으며 한 송이나 잎 하나가 각각 다른 색으로 변할 수 있다(한 송이 꽃 중 매 잎이 다 색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꽃을 보면 여러 색깔로 다양하다). 물론 그녀들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기묘한 장면이 있다. 때로 몇이, 심지어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어떤 형상의 사물로 변할 수 있었다. 


천계는 이같이 아름답고 즐겁다. 그러나 원래 시간 개념이 없는 세계가 더 이상 영원하지 않게 됐다. 천천히 그 층의 천체에 부패와 변이가 타나났다. 무수한 신들은 이 때문에 우려하며 전전긍긍했다. 나중에 인연이 닿아 어느 특정 기회에 많은 신들이 삼계에 내려가 정법(正法)을 하고 전체 우주의 신들을 구도하려는 주불(主佛)을 만났다. 그들은 잇달아 주불과 인연을 맺었으며 인간에 내려와 중생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때 필경 과위(果位)가 있는 신의 형상이 아니어서 어떤 신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장래에 인간세상에서 그녀들을 자신의 아이로 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녀들이 인간계에 내려올 수 있었다. 


또한 정법시기에 위덕을 쌓기 위해(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며 주불께서 인간세상에서 법을 전하실 때 법을 얻을 수 있고 주불과 연을 맺어야 하며 일정한 위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중국 주위에 문화를 널리 알리는 중임을 맡도록 배치됐다. 표면적으로는 주변 국가와 혼인을 맺어 중국문화를 주위에 전하며 문화와 민족 간 화목을 촉진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는 인연을 맺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국은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중심이기 때문에 무수한 신들이 오늘을 위해 많은 문화를 다져주었고 이때 중생은 대법진상을 얻을 기회가 있는데 이런 몇 가지 기연을 역사 중에서 다져야 비로소 오늘날 중생들이 명백하게 알 수 있는 효과를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그저 진상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함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대법서적에서 예사로이 보이는 문자를 보고 적어도 글자 표면을 이해하기 매우 쉽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상 이런 문화의 다지기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화제를 다시 화친공주로 돌려보자. 


어느 공주가 다른 나라의 왕에게 화친하러 갔던지 그녀는 중국의 많은 문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예컨대 ‘천자(天子)’라는 이 직위는 하늘이 인간에게 배치한 것으로 그가 사람을 이끌어 천도(天道)의 요구에 따라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잘하고 못하고는 그 개인의 문제이다. 상고시기에 덕이 높고 여러 사람이 우러러 보는 사람을 선택해 비로소 왕이라고 불렀다. 이 왕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잇고 아래로는 땅의 이익을 접하며 인간과 통한다. 다른 말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관통해야 비로소 왕이 된다고 했다. 또 의식주, 행동 예의 등 각종 신전문화를 여러 지역 백성들의 마음속에 다질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법을 이해하고 진상을 알아 대법의 구도를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화친공주가 나타난 목적과 의의다. 


현재 대륙 밖에 있는 소미(小美)는 바로 서한시대의 해우(解憂) 공주(기원전 121-53년)인데 3대 오손(烏孫)왕 잠추(岑陬-봉호이며 이름은 군수미[軍須靡])에게 시집갔다. 그곳에서 차례로 세 사람의 오손 국왕에게 시집갔으며 여러 자녀를 두었다. 비록 그곳에서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여전히 한나라(漢朝)의 신전문화를 그곳 사람에게 전했으며 마침내 70여세가 됐을 때 한나라 선제에 상소를 올려 한 선제는 옛 공주의 예로 한나라에 돌아오게 맞이했다. 해우공주가 상소문을 올려 돌아온 원인은 내 생각에 중국인이 늘 말하는 그 말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감”과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뿌리로 돌아가는’ 정은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과 피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다. 이런 ‘뿌리’는 우리의 부모 친척으로부터만 생긴 것이 아니라 강렬한 문화적 귀속감이다. 


한(漢)나라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 장기적으로 풍속 문화가 전혀 다르고 심지어 중국에 비해 문명이 멀리 뒤떨어진 곳에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그 고독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나라를 고향으로 생각했고 한나라 황제도 그녀를 고향 사람으로 인정했다. 또한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조건이 되기만 한다면 외부에서 아무리 오래 있었더라도 모두 부모친척이 있는 품을 동경하게 된다. 설사 이때 부모는 세상을 떠나고 고향은 그저 황량한 무덤과 폐허뿐이라도 말이다. 태어나고 자라난 곳에 영원히 눕기를 원하게 된다. 


사실 이런 마음은 이 한 층차 중에서 여와(女媧)가 사람을 만든 일과 중화민족이 모계 씨족 사회에서 시작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토지와 산과 물 등을 자기 집으로 여기며 것은 중화문화 ‘뿌리’의 정신적 부분이 됐다. ‘근본을 잊지 않는’ 이런 마음은 대대적으로 중화문화를 유지하고 계승했다. 우리가 상상해보면 당시 역사 환경 중에서 사람들은 다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을 알았으므로 사람은 예의와 염치가 있어야 하고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아야 하며 음양오행에 따라 일을 하고, 하늘은 존경하고 운명을 알며, 선악에 보응이 있음을 알아야 했다. 사실 신은 일부러 이런 것을 배치해 사람들이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했다. 또 사람이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도록 했다. 좋은 일을 하거나 수행을 아는 사람은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중화문화에서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마음의 근본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뿌리이며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서 사람이 된 근본 목적이다! 


오늘날 소미는 대륙 밖에서 예전처럼 중화전통문화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데 비록 아직 소녀이지만 중화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문화를 알리는 활동에 참여해 중화전통문화를 알리는데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또 앞에서 말한 ‘화친’의 근본 목적은 연을 맺는 것이다. 이 연분이 일단 맺어지면 오늘날 연분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서 환생하든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 그녀가 각종 방식으로 대법 진상을 알릴 때 그들은 감동할 것이며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주불이 뜻있게 배치한 것이다. 


부친이 하남(河南) 사람인 소남(小南)은 수나라(隋朝) 때 화용(華容)공주로 태어나 화친공주가 된 우문(宇文)씨였다. 고창(高昌)의 국왕 국백아(麴伯雅)가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회군한 후 수양제는 화용공주를 국백아에게 보냈고 고창(서역에 위치한 지역)의 왕후가 됐다. 나중에 당나라 정관 연간에 태종이 이씨 성을 내려 상락(常樂)공주에 봉했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 매우 어렸을 때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부모와 함께 청원하러 갔다가 많은 고생을 겪었다. 


또 부모가 모두 동북 사람인 소북(小北)은 당나라 덕종의 여덟 번째 딸로서 위구르족 장수 천친가한(天親可汗)에게 시집을 갔으며 연국(燕國) 양목(襄穆)공주로 봉해졌다. 어렸을 적에 부모를 따라 함께 법공부를 했으며 나중에 결혼해 먼 곳으로 떠났다. 
이런 자세한 것은 편폭의 제한으로 상세히 말하지 않겠다. 


바로 이렇다. 



공주의 화친으로 연을 맺은 지 
윤회전전 천년이 지났네 
오늘날 되돌아보니 
진상을 알리기 위한 준비였네 

公主和親爲結緣 
輾轉輪回過千年 
今朝回首先前事 
爲明真相做鋪墊! 


발표시간: 2012년 7월 23일 

출처: 파룬따파 정견망 zhengj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