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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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영혼의 진화에 있어, 자신이 지금 “고요함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태풍의 눈”, 즉 이원성과 혼란의 중심에 존재하는 고요한 지점으로 접근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아주 많은 고통을 당해왔다는 것을 느껴보세요. 그러한 고통이 과거 생에서 비롯된 폭력과 고문에 따른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거절, 두려움 그리고 비참함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 즉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그러한 느낌을 알 수 있나요? 그것이 바로 내가 체험했던 것이며, 동시에 나를 들어 올려주었으며, 사랑스러운 포옹으로 나를 감싸주었던 자비로운 힘들이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에너지의 여성적인 측면이 나를 편안하게 껴안아주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나에게 필요했던 연민과 애정(kindness)을 고수하고, 이러한 것들이 지구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다름 아닌, 내 어머니(마리아)와, 사랑하는 연인(막달라 마리아)의 여성 에너지였습니다. 이들 덕분에,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내가 그러한 고통을 이겨내고,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 생에 걸친, 개인적인 여정에서 지향해가고 있는 것이 바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세요.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도,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지금 느껴보세요. 특히 내가 지구에 온 이후에, 여러분이 지구에서 살았던 일련의 삶들 가운데 최근의 삶들은 피해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빛의 일꾼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즉 가슴 중심의 의식을 지구로 가져오고, 그로 인해 오해받고, 배척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던 삶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는 폭력과 공격을 받았던 피해자로서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들 속에서, 내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내 옆에 서 있었던 내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미몽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각성(미몽에서 깨어나기)을 강렬하게 체험했으며, 이제는 그러한 환상을 버릴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지닌 사명의 핵심 속으로, 즉 여러분이 지닌 힘의 중심 속으로, - 신성한 고요함 속으로 -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여러분이 지닌 힘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합의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 및 “어둠”과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싸움 대신에, 연민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러한 고요한 지점에 대해, 그리고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를 내려놓는(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고요함(silence)이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고요함(침묵)”이라는 말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요함이란 그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요함은 여러분이 지닌 힘, 즉 여러분의 현존(Presence)이 집중화되고, 강화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세요.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 즉 라디오 및 TV도 없으며, 해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며, 여기에 어떤 강렬함이 더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따금씩 밤에 찾아오게 되며, 밤에 깨어서,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 전혀 없을 경우, 그때 여러분은 자신이 아주 강하다고 느끼게 되며, 외부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요함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심해지거나, 불안 혹은 고통스러운 감정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처음 고요함 속에 몰두하게 될 때에는, 내면에서 대개 시끄러운 소리가 더 커지게 됩니다. 고요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외적인 일과 관련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지속적으로 분주하게 오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내면이 더 시끄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목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나가는 차 소리나, 소곤거리는 소리, 혹은 라디오의 잡음처럼, 생각과 감정들을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뒤로 살짝 물러난 후, 실제의 침묵 속으로, 즉 여러분의 가슴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슴의 중심부에 고요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요함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며, 내용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존재의 상태(pure beingness)입니다. 참된 여러분의 근원에 속해 있는 고요함으로부터, 여러분은 연민과 경이로움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잠시, 이것을 느껴보세요. 이러한 고요함 속에는 고정된 위치나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이 바로 참된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정지된 고요함으로부터, 여러분은 거리를 두고, 내면에서 감정과 생각을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세심하게 조사해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감정이 또다시 존재하네.... 그러한 생각도..... 이것이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그것이 뭘 필요로 하는 걸까? 호기심 많은 방관자의 눈으로 살펴보세요.


고요함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의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의식은 유동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마음자세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요함은 모든 것들에게 “좋아”라고 말하며, 고요함 그 자체는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고요함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관대함과 연민의 눈으로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갑자기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특정한 문제, 즉 여러분을 괴롭히는 어떠한 감정이나, 두려움 혹은 생각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고요함 속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려고 노력하세요. 고요함이라는 관점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을 느끼고 그러한 문제를 수용하도록 애쓰기 바랍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감정들을 어떻게 관찰하고, 체험하기 가장 어려운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살펴보아야 할까요? 문제의 에너지를 끌어당겨, 그 에너지를 고요함 속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는 어떠한 답도, 어떠한 의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고요함 속에서 냉정을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여러분은 모든 것들 내려놓고,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내 동료들과 나를 박해했던 자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기억하나요? 나에게는, 그들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요함 속에서 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근거리는 가슴과 그러한 고요함의 본질을 내면에서 느껴보세요. 그리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게 허용하세요. 자기 자신을 위해, 더 큰 사랑에 가슴의 문을 여세요.


여러분이 몹시 싫어하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신의 일부를 받아들이세요.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의 것, 즉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의 것을 택하세요. 가슴속의 고요함으로부터 그것을 살펴보고, 두 손으로 그것을 잡고, 있는 그대로 살펴보세요. 그것이 두려움인가요, 아니면 좌절감인가요, 그것이 오래된 것으로, 여러분이 없애고자 했던 것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에게 귀중한 뭔가를 가져다주는 것인가요? 여러분을 괴롭히는 이러한 부정적인 에너지가 그 속에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나요?


그것을 자세하게 관찰하세요, 하지만 그것이 그냥 존재할 수 있도록 하세요. 답이 없을 때에는, 그 에너지에게 “네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어. 됐어. 나는 여기 내 존재의 중심 속에 너와 함께 하고 있어. 나는 네가 아니지만, 너는 나와 함께 있어도 돼. 너는 환영받고 있어, 다시 말해, 나는 너를 받아들일 거니까, 안심해. 비록 네가 누군지 그리고 네가 뭘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나는 너를 창조계 속에서 나와 함께 하는, 친구로 받아들여. 내가 너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과 네가 나와 함께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를,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알려줄 거야”라고 말해주세요.


여러분이 가장 혐오하는 에너지와 내면에서 화평을 이루세요. 가슴속의 고요함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살펴보세요. 해결책은 언제나 고요함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혼잡스러운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를 내서,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 속으로 내려가, 고요함 속에서 격렬함(intensity)과 혼란스러움을 대면하고자 할 때, 모든 것들이 서서히 명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확해지도록 강요하지 마세요. 그것은 차츰 누그러져, 고요해지게 됩니다. 고요함(침묵)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개방과 호의(kindness)를 상징하는 본보기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고요함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나를 지탱해주고 있던 고요함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존재하도록 내가 허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여러분도 내면에서 동일한 것을 성취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십자가를, 즉 거부당하고, 버려졌다는 느낌(상처)를 초월해가고 있으며, 내면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부드러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에너지가 나와 함께 하고 있으며, 여러분에게 우리의 사랑을 전하는 바입니다. 이 사랑은 여러분이 현재 삶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여, 여러분이 그 옆에 사랑과 연민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우리의 사랑과 에너지를 받아들여, 이러한 치유에 언제든지 활용하기를 바랍니다.